“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책 제목이다.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에 터를 잡은 이재철, 박후임 부부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행정구역만 남은 현대사회. 우리나라에서 그 대안으로 마을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채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간 ‘마을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성과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근래 행정 중심의 ‘마을만들기’가 일종의 유행이 된 후에는 그저 하나의 ‘사업’으로 전락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마을구성원의 단합을 촉진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여야할 ‘마을만들기’가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재철 씨는 그럼에도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전 세계적으로 환경의 문제, 식량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삶의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부모님들이 살아왔던 전통적인 삶의 방식, 마을공동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마을을 살리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콘크리트를 떠나 흙으로 돌아오다
이재철 박후임 부부는 귀농인이다. 진안과는 일체의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다. 부부는 서울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종교인이었다. 박후임 씨는 목사 안수를 받고 기독여민회 회장을 맡아 구로공단 일대에서 여성과 아동, 빈민들을 대상으로 지역사업을 펼쳐왔다. 이재철 씨 역시 신학을 공부하고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벌여왔다. 그들이 도시에서 보내온 삶은 치열했고 뜨거웠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공허함이 있었다.
“교회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주말농장을 가꿨어요. 처음엔 거칠었던 아이들이 자연을 접하고 변해가는 걸 보면서 처음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 후에 1년간 안식년을 갖으면서 눈을 뜬 것 같아요. 좀 더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 인간의 한계, 시멘트 공간의 한계를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건물로서의 교회,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벗어나고 싶어졌죠.” 후임 씨의 설명이다.
재철 씨도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때는 농촌의 문제나 마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결심한 건 아니었죠. 땅과 자연과 함께 하고 땀 흘려 노동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을 일궈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부는 2000년 무렵부터 차근차근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계사에서 열리는 인드라망 귀농학교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2005년,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부부는 까다로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우연히 소개받은 진안의 저렴한 빈집으로 훌쩍 떠났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빈집에서 부부의 귀농생활이 시작됐다. 할 줄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농촌마을에서 그들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당면과제는 자급자족이었다.
“그래서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택했어요. 저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마을에서 배우려고요. 어르신들께 일을 배우고, 마을의 일을 돕고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 가다보니 묵은 땅도 빌려주시고 일거리도 주셨죠.” 마을에 부대끼면서 그들도 변해갔다. 불필요하다 생각해서 넘길 생각이었던 결혼식도 그맘때 올렸다. 식을 안올렸다는 말에 안타까워하는 마을 어르신들을 보며 “우리 고집으로 다른 분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렇게 해를 보내고 수확을 마쳤지만 자급자족은 요원했다. 큰돈을 벌고자 한 것도 아니었건만 결산을 하고보니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더불어 식구’였다. 도시민 25가구에서 월 2~3만원만 보내준다면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대신 그들에게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제철농산물을 보내주는 방식으로 값을 치렀다. 그렇게 시장을 거치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길을 찾았다.
마을의 보물창고를 열어젖히다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한 후 부부의 시선은 다른 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생활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울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10년 후, 20년 후에도 이 마을이 지속가능할까?”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는 그친지는 이미 오래였고, 1년이면 몇 분의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실지 알 수 없었다. 왜 농촌마을은 10년 후를 장담할 수 없게 됐는가. 부부는 새로운 화두를 잡고 고민했다.
“처음에는 경제적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득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고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재철 씨는 마을에 오미자 작목반을 만들고 직거래 창구를 찾았다. 친환경생산자들을 모임을 만들어 학교급식에 납품도 했다. 7개 마을을 묶어 개발하는 농촌종합개발사업에서는 공공부문 부위원장으로 추천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해관계가 걸린 일들을 맡아 하다보니 자연스레 갈등도 생겨났다.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전하며 조정했지만 갈등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조금씩 지쳐가는 걸 느꼈다. 결과적으로 소득은 높아졌지만 그래서 마을이 행복해졌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때 문득 내가 참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없어도 마을은 지난 수백년간 이어져왔는데, 내가 뭐라고 이래라 저래라 했는가 싶더라고요. 도시에서의 만들어진 내 기준을 갖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오신 분들을 재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던 거죠.”
부부는 다른 곳에서 문제를 찾았다. “가난하고 못 배워서 시골에서 뼈 빠지게 일만하다 늙었다”는 한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학선리 어르신들도 마음 깊이 지니고 있던 응어리였다. 그러나 이방인인 부부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전통과 농촌의 가치를 지켜오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살아온 마을 주민들의 삶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기회는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 마을에 자리 잡은 봉곡교회에서 행복한 노인학교를 기획하면서 부부도 함께 참여하게 됐다. 2008년 1월 농한기를 이용해 행복한 노인학교가 처음 문을 열었다. 인근의 마을들에서 어르신 학생들을 모집하고 귀농귀촌인들을 교사로 불렀다. 한글반, 컴퓨터반, 도예반, 서각반, 미술반, 이야기반 등 어르신들이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과목들이 동아리 형태로 개설됐다. 교회 바로 옆 폐교에는 오랜만에 다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도드라지는 활동을 펼친 것은 바로 후임 씨가 맡았던 한글반과 이야기반. 농한기에만 1주일에 한 번씩 운영되는 다른 반과 달리 한글반은 농번기에도 매주 이어졌다. 자기 이름 석자 쓰지 못하던 것이 한이었던 어르신들은 글자를 깨우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배운 한글실력으로 지역신문에 매주 짧은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야기반은 말 그대로 자기 이야기를 남들에게 털어놓는 동아리. “평소에는 잘 표현하지 않으시지만 어르신들은 마음 속에 아픔이 너무 많아요. 폭력과 고통에 시달린 경험도 있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들도 있죠. 그걸 누가 치유해줄 순 없어요. 하지만 감추지말고 꺼내놓기만 해도 한결 가벼워지거든요.” 언제부터 샴푸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나부터, 시집오던 날 이야기, 14명의 자녀 중 4명만 살아남은 이야기까지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서로를 치유하는 시간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어르신들만이 아니었다. 부부는 행복한 노인학교를 통해 함께 배웠다고 말한다. “한글반에서 꽃 이름을 쓰라고 했어요. 당연히 장미, 백합 같은 꽃들을 쓰시리라 생각했는데, 깨꽃, 콩꽃, 꼬치꽃 이런 꽃들을 쓰시더라고요.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모르는 섬세한 시야를 갖고 계세요.”
교육을 통해 얻은 성과를 보며 부부가 생각해낸 다음 아이디어는 바로 마을박물관이었다. 창고에 처박아 놓은 옛 농기구와 생활용품, 먼지가 뽀얗게 쌓인 사진첩과 일기장도 훌륭한 전시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역사회기여사업을 통해 350만원을 지원받아 노인학교 교실 한 칸을 박물관으로 꾸몄다. 부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시할 물건들을 모았다. 집집마다 잠들어있던 보물들이 먼지를 털고 박물관으로 모여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을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
“보통 물건을 받으러 한집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물건을 내주시면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계속하시니까요. 노인학교에는 시큰둥하셨던 분들도 집에서 골동품들을 꺼내 오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기는 곧 저세상으로 가겠지만 여기 내놓는 물건들은 계속 사람들이 와서 보지 않겠냐고. 그분들에게 마을박물관은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된 거죠.”
2010년 학선리 마을은 진안군마을축제에 “엄니, 손지랑 마을박물관 가게요”라는 주제로 참여했다. 마을을 나간 출향인들을 초청해 함께 박물관을 둘러보며 주민들은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3대가 함께 둘러앉아 마을의 삶을 살펴보며 주민들의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학선리마을박물관에 대한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버스를 대절해 내려오는 이들도 늘었다. 하지만 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재철씨는 학선리마을박물관은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못 박는다. “저희 박물관은 주민들과 출향민들이 보기 위한 공간이거든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거기서 소득을 내려고 만든 곳이 아니니까 매점 만들고, 서비스 인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어요.”
십년 후를 꿈꿀 수 있는 마을을 만들다
큰 돈 들어오는 사업 한 건 없었지만 마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 29가구였던 마을 가구수는 38가구로 늘었다.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에 들어가신 어르신들이 있음에도 가구수가 늘어난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귀농·귀촌·귀향인들이 마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을 바로 인근에 대안학교인 파주자유학교의 진안분교가 들어서면서 자유학교 교사들도 마을에 터를 잡았다. 중학생 아이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2011년 3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행복한 노인학교는 이제 2기 수업을 진행 중이다. 그간 쌓였던 한글반과 이야기반 성과를 바탕으로 자서전 쓰기도 진행 중이다. 극작가의 재능기부를 통해 연극으로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10년 후를 내다보기 어려웠던 마을이 이제 20년 후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학선리만의 성과지만 언젠가는 세계를 구할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부부는 오늘도 마을의 삶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