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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 | 인터뷰 [꿈꾸는 청춘]
아픔을 가진 아이들을 위해
자원봉사자 방영희
방재현 객원기자(2013-12-09 17:07:26)

대가를 바라지 않은 모두가 선행을 베풀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던 동남아시아의 한 여자아이가 낯선 이국땅에 와서 수술을 받고 성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이를 데려와 치료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이 모아졌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아이의 형편과 여건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 있다. 원광대학교 한약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방영희(29)씨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또 다른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남길 수밖에 없는 그를 만나보았다.


아픔을 보듬다
방영희(29)씨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의 아픔을 보살필 줄 아는 아이였다. 장애를 가진 친구를 업고 1년 동안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계 학교에서 선교부의 리더를 맡으면서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을 자처하기도 했다. “친구들을 돕는 일이 보람되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어요.”
고교시절의 생활은 자연스레 방영희씨의 진로를 결정하게 해주었다. 2004년 방영희씨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소외된 계층의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에 실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노동과 사목연구회’와 기존의 남성 중심적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방영희여성 주의적 성향의 ‘물구나무학회’에서 활동하며 자의식과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동남아에서 마주한 현실의 무게
2005년 10월 파키스탄 카슈미르 지방에서 리히터 지진 규모 7.6의 메이저급 지진이 발생했다. 이 대규모 지진으로 파키스탄에서만 7만 3천여 명이 사망했고 10만여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사태를 알게 된 방영희씨는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파키스탄에 가야겠다는 결단 섞인 글을 남겼다.
방영희씨의 방황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던 선후배, 친구들과 주변인들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종잣돈부터 용돈의 일부는 물론, 구석에 감추어두고 아껴두었던 비상금까지 이틀 만에 4백만 원 가량이 모아졌다. 방영희씨는 현장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참혹한 실상을 보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집에 남아있던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었다. 방영희씨는 난민캠프에서 6개월 동안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고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을 돌보았다.
어느 날 아이들 중 하나가 방영희씨를 보자 계속해서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 이유를 묻자 가족들이 열두 명이었는데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하는 자리에 그 아이가 종이로 감싼 선물을 건네주었다. 거절했지만 연신 계속되는 손짓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아이들에게 배급식량으로 나누어주던 밀가루 빵인 ‘로띠’였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모두 허상으로 느껴졌어요.” 그는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듯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한참동안 눈물을 보였다.
이후 대학에서의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그는 2006년 7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갔다. 남부의 지진해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한 지역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현지 주민들은 스스로 피해를 복구할 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구호단체를 통해 방문한 터여서 현장에 가까이 가서 활동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이후 그는 아시아를 체험할 수 있는 독자적인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오랜 준비 끝에 시작된 1년간의 여정은 중국과 티벳, 네팔과 인도,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으로 이어졌고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베트남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여행의 초점은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여성과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길을 바삐 오가며 돈벌이를 하는 6, 7세 정도의 아이들을 보았고 가족을 위해 성매매 현장에 힘없이 내던져지는 여자들을 보았다. 마약을 팔며 폭력을 일삼는 갱들을 보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비상식적인 만행들을 보았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지원단체를 통해 소개받은 마을에 체류하고 농장에서 직접 일을 하며 느끼는 감정들은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참하지도 않았다. 쓸쓸히 느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여행지마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아이들과의 추억들이 위로를 대신할 뿐이다.

원광대 한약학과… 새로 내딛는 발걸음
2009년 2월, 여러 번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방영희씨는 여섯 학기 만에 조기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이전에 바라던 자신의 삶은 이제 꿈꾸지 않는다. 일단 돈을 벌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시 가보자는 생각으로 호주로 가는 관광취업비자를 발급받았다. 낮에는 샐러드와 주스를 만들고 밤에는 바비큐를 구웠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끼니도 걸러 가며 일했다. 영양실조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병원비에 망연자실하고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는 방영희씨는 돈과 관련 되서는 살다보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주에 나갈 때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나간 길이었다. 귀국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여름이 지나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2011년 원광대학교 한약학과에 입학했다. 외국에서도 한약사 면허가 나온다는 사실에 희망을 품고 연고가 없던 전라북도 익산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원광대학교 총학생회와의 인연은 한미FTA 반대집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하며 임원들을 만나고부터였다. 이후 총여학생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으며 여성주의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 학기 동안 책임지고 운영했다. ‘여자 여행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동료들을 이전 네팔 여행 때 알게 된 IWDMC라는 여성단체로 현지 체험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한의과 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학생들이 함께하는 ‘메디컬 연합 토론모임’을 주도해 5학기 째에 접어들고 있기도 하다.

발가락이 발바닥에 붙은 아이, 린
방영희씨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력에 가장 큰 걱정을 하고 있는 이는 그녀의 어머니다. 고민 끝에 방영희씨는 2012년 1월 그 실상을 전해드리고자 어머니를 모시고 한 달 남짓 동남아 여행길에 나섰다. 라오스의 북부 남니옌이라는 소수 민족 마을에 이르렀을 때 방영희씨의 어머니는 어릴 적 고향과 너무도 닮은 마을의 모습에 반하게 되었다.
열흘이 넘도록 머무르는 동안 방영희씨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기만 하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발가락이 발바닥에 붙어 있어 움직임이 불편했다. 아주 어렸을 때 불을 밟아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놀던 아이들이 돌아와 여자아이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속상함도 서글픔도 노여움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는 남모르게 방영희씨가 여자아이를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는 불편한 발을 이끌고 유채꽃이며 산나물을 따다 시장에 내다 팔았고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업고 가축들에게 꼴을 먹였다. 마을사람들은 부모와 아이에게 덧씌워진 허물과 죄가 있어 그런 것이라며 함부로 욕했다. 이후로 다른 아이들보다 여자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방영희씨는 헤어지는 날, 여자아이를 꼭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귀국 후, 방영희씨는 여자아이 린(11)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친구들에게도 전했다. 문득 한 선배가 저금통을 가져와 헐었고, 7만 원가량을 아이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 소식을 접한 다른 선배가 1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를 기회로 방영희씨는 가는 곳마다 린의 딱한 사정을 전파하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학 내 독서퀴즈대회에 참가해 받은 장학금으로 보약의 일종인 ‘경옥고’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반 강제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점차로 모인 성금은 500만원에 다다랐다.
이윽고 라오스 주변국들의 병원에 사실을 의뢰하게 되자 천만 원 상당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각도로 펼친 성금모금 활동에도 불구하고 진척이 되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을 즈음 소식이 대학 본부에 전달됐다. 학생복지처와 원광대학교 병원이 무료수술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방영희씨는 “1년 넘게 걸친 노력이 허사로 끝나지나 않을지 의기소침하고 있었는데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어요.”라며 당시의 솔직한 심정을 표현했다.
방영희씨는 린과 일주일에 한번 전화통화를 한다. 이제 린은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고 남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린은 마을축제에서 주인공이 되었고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스타가 되었다.

어떠한 모양이든
방영희씨는 이 이야기가 미담형식으로 꾸며지는 것에 대해 작은 우려를 표했다. “단순히 선의를 베풀겠다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에요.” 린을 데리러 가기 위해 마을을 방문했을 때 또 다른 아이 엄마가 걷지 못하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왔다. 먼 곳에서 아이를 업고 한참을 걸어온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방영희씨는 동남아 국가들의 의료체계와 제도의 정비가 하루 빨리 앞당겨지기를 고대하고 범국가적이고 인도적인 지원들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희망한다.
방영희씨는 그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해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살지는 않는다. 다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필요한 곳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열심히 일하고 싶을 따름이다. 방영희씨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아갈 것이다.
“아픈 사람이 다시 회복되어 건강하게 복귀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혼자서만 착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칠지 모르는 가난과 폭력을 혼자서 극복할 수는 없을 거에요. 모두가 힘을 모으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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