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고단한 일이다. 발굴현장에서 꼬박 30년을 보낸 김미란씨의 어제와 오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길을 고집스럽게 혹은 이제는 자연스럽게 가는 데에는 결국 ‘오래된 미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깊숙이 박힌 옛 것을 발견하는 것은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옛 것의 자취를 따라, 시간의 결을 거슬러 찾아내는 우리 역사의 희망이 된다.
기껏해야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린다거나 “역사가 새로 쓰인다”는 기자의 호들갑스러운 리포팅과 함께 흙먼지 가득한 유적발굴현장이 ‘고고학’에 대한 하찮은 단상들에 불과하다. 아, 추리소설의 대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14살 연하의 고고학자와 결혼하며 “고고학자니까 내가 늙어갈수록 더 사랑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 것에 무릎을 살짝 쳤을까.
아주 단순하거나 추상적인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화재를 발견하기 위한 연구활동이 고고학이라는 것 외에는 속 깊은 의미나 확장된 가치에 대한 생각이나 인식이 여전히 일반적이지 않은데 반해 사실 그 결과물들은 우리 일상이나 문화 가까이 있다. 누구나 한번은 드나들었을 박물관, 이름난 사찰, 한반도 곳곳의 대표 유적지를 꼭 끼워넣는 수학여행, 찾아진 ‘옛 것’을 만나는 일은 돌이켜보면 우리 여정 곳곳에 추억으로 남아있다.
발굴, 어제와 오늘, 내일을바꾸다
고고학이 우리나라 대학에서 정식으로 연구되었던 것은 60년대 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과 짧은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연구성과는 한반도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고 안팎으로 그 내용을 충실하게 채워내고 있다.
“문화재 발굴이나 기록보존, 복원하는 연구작업들이 역사를 찾아내는 것일까요? 아니요, 이를 통해 역사는 만들어 집니다”, 고고학자 김미란(49세)씨는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문화재 발굴, 고고학, 역사는 ‘재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흔히 발굴현장에서 가장 크게 놀라워하는 유물과 유적의 발견은 근거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과거 문명의 자취를 발견하고, 역사와 삶을 증명하는 ‘증거’들인 것이다. 우리 역사를 꿰뚫고 있는 과학적이고 설득력 있는 흔적들인 셈이다.
지난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옛 것을 발견하는 작업은 단순하거나 추상적인 것에 그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현재에서 미래를 확인하고 규정해내는 매우 실재적인 작업인 것이다. 우리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통로를 통해 수많은 역사의 겹겹을 확인해가며 그 둘레에 놓이게 된다.
여전히 발굴현장에서의 시간이 대부분인 그를 헤아려보니 올해가 발굴현장을 넘나든지 꼭 30년이 되는 해이다. 지역 학계에서는 그에게 ‘발굴현장 여자 최고참’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지 꽤 오래다.
1984년 전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 입학한 그는 동기들이 우르르 떠난 농촌봉사활동이 아닌 발굴현장에서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보냈다. 만복사지 발굴현장에서 꼬박 여름을 나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돌아온 그를 마주하고 동기들은 손사래를 치기도 했지만, 이후 줄곧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현장’이 되고 말았다.
“아직 공부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지만, 발굴현장에서 각기 모양이 다 다른 기와를 보고 선배 연구원들이 어느 시기를 딱딱 말하는데 너무 놀라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 속에 묻혀있던 작은 조각들이 당대의 구체적인 삶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죠. 그때부터 방학은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갈 수 있는 발굴현장에는 어김없이 가게 됐습니다.”
흥미를 붙이며 끈기를 가지고 시작된 전공공부는 대학원 진학과 부여문화재연구소, 금산사박물관과 현재 재직 중인 전라문화유산연구원까지 그에게 전부 아닌 전부가 되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고고학 분야에 대한 수요도 적고, 대학에 학과도 적어서 전공자들이 많지 않았어요. 민간 문화재연구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죠. 그런 덕에 오히려 발굴현장의 해당지역 연구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60년대부터 전문적인 영역이 구축되었지만 부여문화재연구소에 근무하던 때는 척박한 환경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참여한 작업은 익산 왕궁리 유적지 발굴. 이는 그가 지금도 인상 깊게 꼽는 연구작업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부여와 공주로만 손꼽히던 백제문화가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융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미륵사지에 이어 백제역사와 문화의 정점을 찍은 대표적인 유적지이죠.”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 시기로 추정, 궁궐터와 사찰터가 혼재돼 있는 유적으로 1989년부터 20년이 넘게 발굴작업이 진행된 곳이다. 왕궁리 유적의 발굴로 백제권의 지역적 범위는 더욱 확장되었으며 백제문화에 대한 다양한 후속 연구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고고학이란 학문은 사실 어마어마하고 두려운 학문이 아닐 수 없다. 궁궐터의 발견으로 백제 권역은 확장되고, 오래된 좁쌀 한톨로 한반도 쌀의 역사는 1000년이나 앞당겨 졌다. 일본에서는 희대의 유물조작 사건이 일어났고, 예부터 강대국에서는 유물 약탈에 불을 켰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진짜건 가짜건 역사의 재생은 치열하게 지속되고 있다.
‘나와의 싸움’을 통해 지난 시간을 만나는 일
땅 속 깊이 죽어있는 시간을 들춰내는 것 같지만, 고고학자에게 현장에서의 시간은 곧이곧대로 ‘자기와의 싸움’이다. 보통 문화재발굴 기간은 긴급발굴을 제외한다면, 10년, 20년이 훌쩍 넘는다. 1979년부터 시작된 익산 미륵사지 발굴은 1996년 발굴단을 해단했고, 익산 왕궁리 유적발굴도 1989년 시작됐다. 발굴지의 기록보존, 복원사업 기간까지 합한다면 그 세월은 엄청나다.
이 기간 동안 연구원들이 현장을 찾는 횟수는 ‘비오는 날’만을 제외하고 매일이다. 1년 365일 발굴작업에 매달리는 셈이다. 매일같이 같은 현장을 드나들며 지난 과거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
본격적인 발굴, 발굴에 앞서 이뤄지는 지표조사 작업에서 연구자들이 먼저 하는 일은 현장 일대의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이다. ‘땅’을 들여다보기 전에 현장 일대를 조망하는 것은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이다. 과거와 현재 모든 삶터와 문화권은 지형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되고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은 현장에서 소위 땅을 파고 뒤지는 같은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연구자가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이 바로 ‘매너리즘’입니다. 그래서 발굴현장에서 가장 먼저 이뤄지는 작업은 ‘땅’이 아닌 높은 곳에 올라 ‘조망’을 하는 것입니다. 추정되는 시기와 기존에 연구된 역사적인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발굴현장에서는 그 근거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폭넓은 문명, 역사, 지난 삶에 대한 인식과 체계를 끊임없이 가동시키며 발굴작업에 임해야 하죠. 그렇지 않다면 그 수많은 역사의 자취와 흔적들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높은 산을 뒤로 하고, 풍성한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발굴현장에서는 어김없이 옛 사람의 이야기가 발견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터와 터를 감싸는 광활한 풍광에서는 왕의 역사가, 천 년 전 융성한 문화의 맥이 흐른다. 오늘날 대규모 토목사업이나 건설사업이 진행되는 그야말로 ‘요지’에서 꼭 발견되는 옛 것의 자취들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좋은 곳에 있어야 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라는 것이 그의 간단하지만 정확한 설명이다.
가장 좋은 발굴은 ‘그 자리 그대로’
다양한 현장 중에서도 그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 터’ 이다.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우리나라에서 활발한 문화재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은 단연 사찰터다. 그 역시 부여문화재연구소 재직 당시 주로 행했던 발굴현장은 사찰이었다. 남원 실상사 발굴 작업과 부여 용정리 사지 발굴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사찰 발굴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대학시절 첫 발굴작업 현장이었던 만복사지 발굴현장 때부터 그 인연이 닿았던 셈이다.
‘절터’에 대한 연구들은 더 많은 가지를 길러내면서 사찰에 대한 관심까지 옮겨갔다. 그렇게 연구소 생활을 마감하고 옮겨간 곳이 김제 금산사이다. 금산사박물관은 그에게 새로운 관심을 낳게 한 곳이다. 문화재들의 ‘제 자리’에 대한 고민이었다.
주요 사찰들이 관련 박물관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지금도 그는 속 시원하게 답을 내놓지 못하지만, 비단 사찰 뿐만 아니라 유물과 유적의 자리는 본래의 그 자리라고 생각한다.
“금산사박물관에 일하면서 했던 작업들은 보관과 보존에 관한 작업들이었어요. 다 아시다시피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에 우선돼야 하는 작업들이니까요. 본래 사찰 발굴을 하면서 또 금산사에서 오래 작업을 하면서 주요 문화재들의 자리가 바로 그 사찰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치못할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기도 하지만, 실상사의 유물들이 실상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것이지 다른 장소나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최선일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사찰 뿐만 아니라 모든 유물과 유적이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죠. 많은 이해관계들이 상충돼있고 전문적인 시각도 다른 만큼 충분한 논의나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단순한 유물 하나를 볼 때마다 실물은 사라졌더라도 그것이 놓여있던 실제 현장이 주는 감흥이 더 크고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심히 ‘파헤치던’ 시절을 지나 그가 고민하는 지점은 하나, 둘 늘어간다. 발굴현장에서의 고민과 연구가 현장 밖으로까지 이어져 나갔다. 사실 이것은 연구자들의 오랜 고민이기도 하다. ‘발굴’이 본래의 목적이 아닌, 개발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나 도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가치와 현재적 가치가 상충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하나 꼭 집어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이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과거나 역사로만 규정할 수 없죠. 역사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오늘이 되기도 하고 내일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인식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 어쩌면 가장 우리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지키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특별할 것이 없다며 개인사 보다는 두런두런 현장의 안팎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말하는 가장 좋은 발굴은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이라는 여태껏 걸어온 길과는 다른 아이러니한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속내 깊은, 지금 그의 길에서 그가 마주한 여러 고민들이 녹아든 한 마디다. 발굴현장의 현지 보존은 여전한 꿈이라는 그의 말에서 고단한 현장작업의 허탈함마저 느껴진다. 여전히 녹록치 않은 발굴 현장에 대한 고민이 있는 그대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믿는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의문점들이 새로운 고고학적 지식과 발견을 통해 현재도 풀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풀려질 것이라고. 또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역사의 흔적, 문명의 자취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의 역사와 의문은 계속해서 그 겹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