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미래학자들의 예언 때문일까? 2,000년 이후 별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지역 경제의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거나 향후 백년을 보장하는 새로운 먹거리(신규 수종 산업) 창출의 한 방편으로, 테마파크와 복합문화공간, 문화관광축제 등 지역의 문화관련 랜드마크 시설 및 브랜드 아이템 개발이 유행처럼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를 휩쓸고 있다. 아무래도 스페인의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 영국의 게이츠헤드(세이지음악당 & 발틱현대미술관), 프랑스의 아비뇽과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공연예술축제) 등 쇠락해가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역 도시를 세계적 관광 명소로 변모시킨 문화예술의 힘과 성공사례에 고무되는 탓일 것이다. 더불어 자연의 절경과 대규모로 동원된 지역 주민들을 활용한 스펙터클한 공연으로 외국관광객을 쓸어 담고 있는 중국의 계림, 여강, 항주(장이머우 연출의 <인상> 시리즈) 등 사례까지 더해지면, ‘우리도 한번’이라는 매력적인 성취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역 브랜드 공연’을 추진하는 지자체 관계자들은 대부분 중국의 <인상> 시리즈와 같이 지역 경제의 획기적 도약을 가능케 할 한 방, 소위 ‘킬러 콘텐츠’를 어렴풋하게나마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공연 앞에 ‘브랜드’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순간, 모든 예술적 고려를 제쳐두고 숙명적으로 투자비 이상의 돈을 벌어야만 될 것 같은 부담이 앞서게 된다. 게다가 ‘지역’을 대표하는 고유의 소재나 독특한 형식으로, 첫술에 그냥 레퍼토리도 아닌 ‘상설’ 공연까지 만들어야 된다면 버거움은 백배가 된다. 그 모든 버거움을 이겨내고 예술적 완성도 뿐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면서 지속적으로 수익까지 창출하는 문화상품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이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는 편에서는) 감탄스러운 한편, 문화예술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배려는 잘 드러나지 않은 채(물론, 어느 지역에서나 사전 준비 단계에서 수많은 숙고가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발상으로 비슷비슷하게 유행처럼 반복되는 시도들이 이젠 좀 안타깝다.
일단, 최근에 직접 보았거나 풍문으로라도 접해본 ‘지역 브랜드 공연’만 꼽아 봐도 천안시와 서울예술단이 함께 만드는 가무악극 <소서노>, 순천시가 만든 뮤지컬 <태백산맥>, 성남시(성남아트센터)가 만든 뮤지컬 <남한산성>, 경상남도와 연희단거리패가 함께 만든 뮤지컬 <이순신>, 경기도(경기도문화전당)가 만든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 및 태권도 퍼포먼스
이들 대부분은 지역 주민을 넘어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 브랜드’를 표방하므로 당연히 지역 고유의 역사, 인물, 이야깃거리 등에서 소재를 취하긴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국내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장 흥행성 높은 뮤지컬 장르와 해외 관광객을 겨냥한 넌버벌 장르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상>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실경 퍼포먼스도 새로운 유행처럼 여러 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매년 일정 기간 재공연되는 레퍼토리 공연을 넘어 연중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상설공연까지를 목표로 한다면 지역 주민과 내국인 관광객만으로는 객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실제로 국내에서 연중 관객의 70~80%를 해외 관광객으로 채우며 해를 거듭하여 성공적으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대부분의 상설공연은 <난타>, <점프>, <비밥>, <사춤>, <미소-춘향연가> 등 넌버벌 퍼포먼스 장르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식처럼 에든버러 프린지 등 해외 아트마켓을 통해 작품을 선보이고, 애초부터 궁극적으로 외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 콘텐츠를 겨냥해서 만들어졌다. 물론, 정동극장의 전통 가무악극 <미소-춘향연가>처럼 서울을 찾는 해외 관광객을 겨냥하여 우리 고유의 노래, 춤, 악기 연주 등의 눈대목을 엮어 만든 상설공연도 있다.
애초에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작심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을 만들 계획이라면 지극히 희귀한 위의 성공사례들을 철저히 벤치마킹해서 투자손실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지역 브랜드 공연’을 만들기 전에 그 가치를 찬찬히 다시 살펴보고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한 뒤, 좀 느긋하게 추진했으면 좋겠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장기 상설공연으로 명성을 떨치는 극소수 흥행 뮤지컬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 수많은 창작 실험 및 대중의 취향과 기호를 반영해 업그레이드 개작을 한 노력들이 숨어 있다. 또한, 기존의 동물곡예와 묘기의 나열로 일관하던 서커스에 이야기와 춤과 음악과 스펙터클한 무대장치 등을 덧붙여 뉴 서커스라는 새로운 형식의 블루오션을 만들어 낸 ‘태양의 서커스’ 시리즈나, 그 곳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실경 퍼포먼스 <인상> 시리즈처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역 고유의 새로운 공연 양식을 개발하는 일도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상설공연이 가능할 만큼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킬러 콘텐츠가 숙성되기 전까지는 우선적으로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기반 시설에서 매년 지속적으로 재공연될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 공연을 개발하여 지역 주민을 먼저 만족시키는 것으로 소박한 목표를 세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될 성부른 묘목을 골라 꾸준히 물주고 가지치고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지역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놀러온 사람들까지 그 그늘 밑에서 넉넉하게 쉴 수 있을 만큼 넓고 우뚝한 나무로 자랄 것이다. 더불어 체육 분야에서 요즘 학교 체육과 사회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투자를 집중하는 것처럼 이런 묘목들과 나무들이 잘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땅을 비옥하게 가꾸는 일도 중요하다. 일본 가나자와의 시민예술촌과 같이 지역의 학생들과 주민들이 저마다 하나 이상의 연극이나 무용이나 음악(노래 및 악기연주) 등 공연예술 동아리에 가입해서 예술적 소양을 쌓고 기꺼이 즐길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여 지역 레퍼토리 및 브랜드 공연이 절로 피어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우선적으로 투자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스럽게 지역 문화예술의 ‘브랜드’로 내세우는 지자체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뒷담화 : 모든 사람들은 연극성, 춤성, 음악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단지 시간이나 돈이 궁핍하거나 기회가 없어서 그것들을 개발하거나 즐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속담처럼 제 아무리 애써서 ‘지역 브랜드 공연’을 만들어놔도 우선 지역 주민들이 만족하거나 즐기지 못한다면 언감생심 레퍼토리나 더 나아가 상설공연을 꿈꿀 것인가? ‘킬러 콘텐츠’ 한 방을 성공시킬 확률 및 거기에 드는 시간과 비용과 파급효과 대비 소위 ‘예술향유 기반조성’이 흔히들 생각하듯 경제적 효율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인지. 의미는 있지만 그렇게 무모하고 멀기만 한 길인지? 경험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성공확률이 높을(보다 많은 지역 주민이 행복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킬러 콘텐츠’를 만들 시간과 비용을 단축할 수 있는 효율적 투자일) 것만 같은데… 입증할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