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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5 | 특집 [전북문화개혁사발통문]
기억하는 역사가 남긴 유산,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2014-04-29 14:06:10)

우리는 지금 딛고 있는 땅에 누군가가 먼저 살아갔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희노애락을 나누고 생로병사를 겪는 터에도 , 똑같이 살아간 사람들이 다양한 자취를 남기며 삶을 지속했다. 그것은 역사가 된다. 

그런 이유로 역사는 공통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땅에 사는 이들이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며 공동체의 오늘을 규정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우리와 뿌리와 정체성은역사라는 이름 아래 동떨어지고, 희미해지기도 한다. 현재의 삶을 잇지 못하는 역사들은 어김없이 책과 박물관에 갇혀 단순한 과거로 기억될 뿐이다.  

그런데 돌아보라.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역사를 담은 무수한 공간들이 있다. 담장이 둘러쳐져 현재와 격리된 공간도 있고, 누구도 모르게 버려지고 방치된 곳도 있다. 소중한 공간들을 어떻게 우리는 오늘과 연결짓고, 모두의 공간으로 삼아야 것인가. 연중기획 번째 주제는  오늘과 함께 쉬는 역사공간을 위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와 자연스럽게 닿아있는 역사, 땅을 먼저 살아간 이들을 박물관과 교과서 밖에서 만날 있는 공간을 위한 지혜를 들어봤다. 근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전라감영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글을 실었다. 제대로 활용과 더불어 내일을 위한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역사공간의 보존, 그리고 활용은 단지 과거를 간직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유산, 전주가 품어야

문병학 시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19세기말, 1894 전후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동양적 근대와 서구적 근대가 극적으로 교차한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집강소를 설치하고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한 것이 1894 6 전후이다. 그리고 1896년에는 지금의 서문교회 자리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왔고, 곧이어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터전이 마련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따라서 전주성 주변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중요한 역사유적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 정책방향은 편향적으로 조선건국자의 본향(豊沛地響)이라는 점만 부각시켰다. 전주는 조선 건국자의 본향일 아니라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 동양적 근대를 추구한 한국 근대정치가 태동한 역사적인 고장이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1894 3 20 무장포고문을 공포하고보국안민창의 기치를 들고 전국적인 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른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전투, 황룡강전투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京軍) 차례로 격파하고, 마침내 4 27일에는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협상을 통해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 설치를 합의, 전라감영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 대도소를 설치했다. 전주가 조선건국자의 본향임과 동시에 전제왕조체제의 한계를 넘어 근대민주정치의 관문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갑자가 지난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 근대 시작지점에서 전주가 수행한 역사적 위상을 지역발전의 기재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행정기관의 안목과 역사인식 부재 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지난 세기 동안 극심하게 굴절되어온 한국 근현대사의 부침에 주된 원인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조선정부군 등에 의해 쓰러진 조선은 일제식민지로 전락했고, 해방 후에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 과정에서 극심한 좌우대립·민족분단·한국전쟁 등으로 혼란이 극심했다.  연장선상에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군사정권시기가 이어지면서 근대 초입 전주의 역사는 망각되었고, 동학농민혁명사 또한 역사의 뒤안길에 암장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주의 역사는 탈현실적인 조선건국자의 본향이라는 박제화 절름발이 역사인식만이 남았다. 

  21세기 문화정보화시대, 우리는 서둘러서 지난 세기 동안 박제화 되어온 전주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에 나설 필요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위상은 역사발전의 역방향이고, 근대적 폐정개혁을 단행한 동학농민군의 집강소 통치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역사발전의 순방향을 따라 전주의 역사를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들은 전라감영(선화당) 전체와 농민군 전주성 입성 경로였던 용머리고개, 패서문, 풍남문 등이 있다. 김개남 장군을 처형한 곤지산자락 초록바위가 있고, 농민군과 경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곤지산, 완산칠봉, 다가산, 유연대, 황학대 등이 있다. 이들 유적지들은 현재 방치된 상태에 있다. 동학농민군의 근대지향 숨결이 서린 이들 유적지들을 전주한옥마을의 외연확장의 기재로 삼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맛과 그리고 전통음식을 중심에 전주한옥마을에다가 전주의 근대역사 유적을 연계시켜낸다면 그대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차원으로 전주라는 도시의 외연 확장을 기할 있을 것이다. 나아가 난항에 빠진 전북(전주)지역의 21세기적 전망 모색에도 도움이 것이다. 



근대건축물, 가치를 살리는 활용이 보존

송석기 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군산시에서 지난 년간 진행해온근대문화도시조성사업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근대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 활용 계획이 시작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특히, 2001 등록문화재제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면서 개별적으로 관리되던 근대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되었다. 군산시에서도 2007 군산시 원도심 활성화 지원조례와 2008 군산시 경관조례를 제정함으로써 법제적인 뒷받침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2009 내항지역의근대문화벨트화 사업 원도심의근대역사경관 사업으로 구체화되었고 사업이 근대문화도시조성사업의 근간이 되었다.

근대문화벨트화 사업을 통하여 군산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문화유산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은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탈바꿈하였고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은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근대역사경관 사업은 원도심의집중화 권역이라 부르는 2 블록에 소공원과 근린생활시설,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으로서, 1 블록이 먼저 조성되어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근대문화벨트화 사업 영역으로 연결되는 가로 경관을 정비하는 사업이 시행 중에 있다.

원도심과 내항의 근대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활용 사업과 동시에 군산시 외곽에 산재한 건축문화유산에 대해서도 보존과 활용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개정동의 이영춘 가옥은쌍천 이영춘박사 전시관으로, 구암동의 구암교회는군산3.1운동전시관으로 문을 열었다. 임피역에는 테마공원이 조성되었다. 군산시는 근대문화도시조성사업을 통해 추진해온 원도심 지역의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정비 사업을 지속할 예정이다.

역사적인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활용은 원형 보존에서 활용을 통한 보존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개별 건축물 중심의 건축문화유산 보존에서 점차 또는 면적인 보존 개념이 국제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면적인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개념은 최근 도시 재생을 위한 중요한 전략 하나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건축문화유산의 활용과 도심 재생의 측면을 강조하고, 개별 건축물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군산의 근대문화도시조성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있을 것이다.

향후 지속적인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보존 활용 대상의 확대이다.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으나생활문화유산이나건축문화자산 같이 보다 넓은 개념으로의 확장을 통하여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보다 광범위한 물리적 환경에 대한 보존과 활용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는 관광자원 중심의 활용으로 인해 건축문화유산의 역사적 진정성이 훼손되는 문제이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경제적 가치보다는 해당 건축문화유산이 갖는 구체적인 가치를 세부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섬세하게 보존하는 것이 보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활용 가치를 만들어 있을 것이다. 



전라감영 복원, 이제 제대로 시작되어야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전라감영 복원문제가 최근 시장 입지자들의 선거공약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먼저 전라감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건국후 1392 태조원년 8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완산부에서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다가 1403 태종 3 전주부로 명칭이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총괄하던 감영이 전주에 설치되었는데 56 군현을 관할하였고 전주가 수부였다. 전라감영은 전북도청 자리이고 전주부영은 기업은행 자리이다. 전라감영 전체 면적은 1 2천평 정도인데 중심건물은 선화당으로 78평에 달하는 5칸건물이었다. 1921 일제가 신청사를 건립하였는데 1951 한국전쟁당시 선화당에 보관 중이던 화약폭발로 도청본관과 선화당이 소실되었다. 

전라감영은 경기전과 함께조선왕조 발상지 전주 대표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지방통치의 중심이면서 전라도의 문화 발신지로서 호남문화의 대표공간으로서 자리하였다.

감영에서 각종 의례와 연회를 위해 만들었던 음식이 전주음식이 되었고 전라도 한정식문화로 계승되었다. 감영의 지소에서 만들었던 종이는 최상의 종이로 왕실에 공헌되어 한국최고의 종이로 명성을 떨쳤다. 감영에서 수많은 서적을 출판했던 목판들은 현재까지도 5000여매가 보존되어 전라감영이 한국 전통 출판문화의 중심이자 지식을 확대 재생산시켰던 전통지식문화의 중심임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지방관리들이 서로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 시작한 소리경연이 전주대사습으로 발전해 한국소리문화의 전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주의 특산품 부채가 만들어지던 역시 전라감영의 선자청이었고,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국도 감영에 설치돼있었다. 그뿐인가, 1894 동학농민혁명 당시 땅에서 처음으로 관과 민이 함께 통치하였던 집강소통치의 현장 , 전통 민주주의의 출발지 역시 감영이었다. 전라감영은 오늘날의 전주와 호남문화의 산실이자 문화백화점과 같은 공간인 셈이다. 

이러한 전라감영의 복원은 감영의 대표공간인 선화당의 정확한 위치확인이 되지 않아 지지부진하였다. 그런데 2011 12월말 전주역사박물관이 국가기록원 자료를 조사하던 전라감영 선화당의 정확한 위치가 그려진 1931년도 청사진도면을 찾게 감영복원의 획기적 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지난 2012 8 전라감영복원 기본계획안이 경쟁을 통해 정해졌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있다. 당시 전라감영 복원추진위원들이 참여해 깊은 논의를 통해 당선작이 선정되었어야 하는 일부 관련자만으로 선정되어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후 전라감영 복원추진위원회에서 정확한 설명과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현재까지 철거문제와 연결되어 방치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라감영은 복원계획과 함께 활용방안까지 함께 마련하여 단순히 박제화된 공간복원이 아니라 전라도의 문화, 한국의 대표적 전통문화가 함께 살아 쉬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대문까지 복원되면 전주는 전통 지방통치(전라감영, 객사) 의례(경기전), 그리고 전통교육(향교) 전통생활(한옥마을), 읍성공간(풍남문 사대문) 전통교역(남문시장) 다채로운 전통문화도시의 공간을 갖추게 된다.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자리 잡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문화유산도시로 발돋움하는 미래도 전망해볼 있다. 전통공간과 한국 전통 생활문화가 결합해 명실상부한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한국을 느끼자 구호가 현실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전라감영 복원은 전주 역사성의 회복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1990년대 중반 전라감영 복원이 제기된지 올해로 20여년이 된다. 2005 도청사를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감영복원논의가 본격화 된지는 10여년이 되었고, 2009년에 전라감영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된지도 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전라감영복원은 거의 제자리이다. 

2012 추진위에서 모아진 전라감영 복원안은 구도청건물 철거후 동편은 선화당, 내아, 관풍각, 내삼문 너댓 채의 건물을 복원하고, 서편은 그대로 두거나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공모된 2012 당선안은 서편쪽에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필자는 동편 복원에는 찬성하지만 서편 문화시설 건립에는 반대한다.

전라감영은 오늘날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포괄된 조선시대 전라도를 통괄하던 지방정부이다. 전라감영복원 논의는 전주의 자존심과 관련된 역사성 회복과  도청 이전후 공허해진 원도심의 활성화라는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전라감영을 복원하는 것이 가지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전라감영부지 12천평을 모두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구도청사부지 5천여평이라도 온전히 복원하자는 것이다. 너댓 채의 건물을 복원해서는 감영의 위상을 보여줄 없다. 반쪽은 감영을 복원하고 반쪽은 문화시설을 건립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문화시설은 완산경찰서 구도청사 주변을 활용해야 한다.

또한 국가문화재인 사적지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적으로 지정되면 복원 외의 부지활용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지정 반대 이유이나, 부지에 다른 시설을 건립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소된다. 전라감영부지 전체가 아니라 구도청사부지만 사적으로 지정 받자는 것이다. 사적지정이 되면 위상도 높아지고 복원예산 확보도 숨통이 트일 있다. 

복원에 반대하는 이유로 다른 도의 감영복원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크다. 그러나 전라감영은 우선 입지조건이 다르다. 전라감영은 전국적 명소로 자리한 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경기전 서문으로 나오면 감영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빈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다른 도의 감영과 달리 건물 하나하나를 성격에 맞게 전시관으로 꾸미고, 건물밖은 체험공간으로 활용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찾는 살아 있는 공간이 있다. 감영박물관의 컨셉으로 가는 것도 방안이며, 전주역사박물관을 여기로 이전하는 것도 검토될 있다.

웬만한 문화시설로는 독특성과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다. 전라감영은 역사성으로 사람들을 모을 있다. 한옥마을의 성공은 이를 말해준다. 문화시설보다는 감영복원이 가치 있고 지속적인 문화관광자원이다.

경북이 올해 대구감영 복원 기본계획용역을 발주하고, 사적지정을 추진한다고 한다. 전북도지사와 전주시장 후보들에게 전라감영 복원여부에 대한 생각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 전라감영이 복원되어서 역사를 통해 희망을 이어가는 전주와 전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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