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흔여덟의 청년이었다. 아니, 마흔여덟의 젊은 ‘쟁이’였다. 그와의 대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힘이 넘쳤다. 삶의 궤적을 따라 대학 풍물패 이야기를 할 때도, 풍물의 역사와 좌도농악의 가야할 길을 이야기할 때도 그는 정의감 투철한 청년인 냥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들을 풀어 놓았다. 그래서 그가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더 많은 것을 후대를 통해 이뤄내기 위해.
그가 김정헌이다. 유명철 선생의 첫 번째 제자이며, ‘새끼 유명철’로 불리는 김정헌이다. 그의 삶은 남원농악과 함께 울고 웃었다. 그의 이야기가 남원농악의 역사가 되었고, 그의 삶이 남원농악의 미래가 될 것이다. 남원농악 이수자, 남원시립국악연수원 농악반 강사로 호남좌도농악의 맥을 잇는 그를 만났다.
첫 번째 제자가 된다는 기쁨으로 달려간 남원
그와 농악의 인연은 대학으로 거슬러 오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조촐한 시집도 냈던 문학청년이었던 그였지만 풍물패 생활을 하며 농악의 재미에 빠졌다. 필봉농악이 대세였던 80년대 중반 그의 풍물패는 특이하게도 진안 중평굿을 했다. 어쩌면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진안 중평굿 전수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그의 인생을 뒤흔들 이름을 듣게 된다. “어느 날, 김봉열 선생이 부포놀이를 보여주며 ‘나는 이정도 밖에 못하는데 남원 금지의 유한준이 기가 막히다’고 했어요. 선생은 유명철 선생과 아버지 유한준 선생의 이름을 들며 부포놀이는 이들을 따라갈 자가 없다고 하셨죠. 아마추어가 보아도 다양하지 못한 선생의 부포놀이를 보며 유한준, 유명철의 이름이 머릿속에 콱 하고 박혔죠.”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가슴 뜨거웠던 청년은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성남의 한 현장으로 갔다. 깜냥이 되지 못했던 건지, 그를 예쁘게 봤던 건지, 선배들은 그가 현장취업이 아니라 외곽단체에 있기를 바랐다. 그의 농악 재능을 알아봤는지 직함도 문화국장이라 달아주고 일터노동회관에서 노동자들에게 농악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다 그는 판소리를 배우러 무작정 남원을 오가기 시작했다. 남원에 한두 달 눌러 살며 판소리, 농악을 배웠다. 그렇게 92년은 남원과 그의 인연이 시작된 해가 됐다.
그는 남원에서 ‘품앗이’라는 단체와 만나 문화운동을 시작했고 얼마 후 전문가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모인 ‘벗음새’를 구성하고 상쇠역할을 했다. 그리고 벗음새가 주막을 열었던 춘향제에서 유명철 선생을 봤다. “새마을 모자를 쓴 사람 앞에서 선배들이 절절 매는 거예요. 그분이 유명철 선생이라는 거죠. 10여년 농악은 안하시고 농사만 짓던 때였는데, 술 한 잔 드시더니 치는 꽹과리가 대단했어요. 필봉이나 진안 농악은 같은 가락을 반복하는데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치더군요. 뭔가 정교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머리에 박힌 선생의 이름과 선생의 기술을 보자,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선생에게 달려가 알려 달라했다. 선생은 ‘농악 안 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성남으로 돌아왔다. 가진 것 없던 그가 철부지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며 선생과의 인연이 끝날 것 같았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면서 우유배달에 학원 강사에 먹고살 궁리에 세월은 흘렀다. 그렇게 안 맞는 옷 입은 것처럼 살던 삶은 남원에서 걸려온 한 통화의 전화로 뒤바뀐다.
유명철 선생에게 강습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남원 형님들의 전화였다. 토요일마다 하는 강습이었지만 그는 무조건 한다고 했다. 녹음이 옅어지던 94년 9월의 일이다. 그는 아직도 선생에게 첫 강습을 받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날 선생은 개꼬리 상모를 만드는 것부터 배울 것과 끝까지 배울 것을 주문한 후에야 가락을 가르쳤다. “선생은 가장 어렵다는 영산가락을 알려주셨어요. 선배들 대여섯과 함께 배우는데, 선생의 마음에 드셨는지 ‘너희들 같으면 가르칠 수 있겠다’ 하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를 시험하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선생의 윗놀음을 배운다는 절망감
이듬해 여름, 좌도농악의 두 거장이었던 양순용, 김봉영 선생이 연달아 생을 마쳤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시국이 달라지고 노동회관이 사라지며 성남에 거처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가는 것도, 가면을 쓴 것 같았던 정장차림의 학원강사 일도 못할 짓이다 싶었다. 찬바람 치던 그해 11월 “전문 굿쟁이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아내와 짐을 꾸려 남원으로 이사를 왔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호남좌도농악의 거장에게 배움을 청할 수 있다는 생각도 컸다. 임실 강진 태생의 그가 고향을 버리고 남원농악을 하게 된 사연이었다.
유명철 선생의 첫 번째 제자가 된다는 기쁨도 잠시, 그의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성남에서 고생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원에서의 삶과는 비교가 안됐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없어 담배를 사 피우지도 못했다. “정 안되면 다시 학원 강사를 한다는 마지노선이 있었지만 그리 가면 굿쟁이가 아잖아요. 꽹과리를 처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농악을 배웠어요. 실력으로 프로가 아니라 내 생계수단이 그것이었을 때 프로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죠.”
친구가 부러워 간, 그의 삶을 더 궁핍하게 했던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남원시립농악단이 생기며 강습과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수도 하고 강습비도 받으며 ‘프로’의 길을 갈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유명철 선생과의 배움은 어렵기만 했다. “판굿의 틀이 같은 좌도굿을 7여년 했으니 굿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1년도 안되서 가락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였죠. 문제는 상모를 돌리는 것이었어요. 가락을 받아치고 속도는 빨라지는데, 몸 발 머리를 따로 놀려야 하는 게 남원농악이거든요. 그런데 선생은 그 대목이 재미있다며 즐기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대목이 진짜 죽겠는데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윗놀음이 발달한 남원농악은 상모를 돌리는 외사, 사사의 간단한 동작이 아니라 다양한 상모놀이가 있다. 테두리를 찍는 전조시, 돌려서 뒤로 갔다 앞으로 오는 퍼넘기기, 연꽃봉우리가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노는 연봉놀이, 개꼬리처럼 세워서 살랑거리는 개꼬리 놀이, 상모 위로 올려서 돌리는 부포새림 등 이름도 동작도 갖가지다. 선생은 개별동작만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따라하게 했다. 당연히 가락을 치며 상모가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가슴을 후비는 선생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나는 한평생 연습이란 걸 안 해봤다. 난 너희들이 이해가 안 간다.” 실전에 단련된 선생과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의 절망감이 되살아나는 듯 그는 한숨을 내쉰다.
‘동네 상쇠는 되겠구나’하던 선생에게 사사한지 10년이 되고서야 한 사람의 굿쟁이가 될 수 있었다. 2004년 여름 남원의 야외무대는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안겨줬다. 그리고 그 공연을 통해 그는 ‘새끼 유명철’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1천명의 관객이 꽉 들어찬 무대에서 쇠 개인놀이를 하고 상모를 딱 세웠는데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잘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이야, 이 맛이다 했어요. 그때의 행복하고 기쁜 감정은 저를 지금까지 오게 할 수 있던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부족하다면 제자를 통해 이뤄 내리라
하지만 그는 대학풍물패로 농악을 시작한 늦깎이여서 10대에 시작한 사람들에 비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 세대만큼 할 수 없다는 것에 속도 상했다. 그래서 그는 교육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 96년 청소년수련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남원농악을 풍성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늦깎이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내가 못하면 제자라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후세대가 양성되지 않으면 농악의 앞날은 없잖아요.”
2002년 그는 남원 학생농악단을 꾸려 본격적으로 남원농악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농악을 가르쳐온 지 10여년. 국악 관련학과에 간 전공자만도 70여명에 다다르고 이미 5명의 제자들이 남원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농악은 사람이 많아야 되는데 10여년 가르쳐 놓으니 스물이 넘는 인원이 모여 언제나 공연이 가능해졌다”는 그는 이들을 연어 때에 비유한다. 연어가 고향을 찾아오듯 남원농악을 배운 아이들이 남원에 돌아와 농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바다로 갔다 돌아오는 연어가 몇 안 되긴 해요. 그러니 더 많은 연어가 돌아올 수 있도록 알을 많이 낳아야겠죠. 또 더 많은 연어들이 돌아올 자리를 남원에 마련해야 해요. 남원농악이 더 잘 나가기 위해서는 젊은 굿쟁이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져야 할 거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남원농악을 가르친 덕분에 개꼬리 상모는 멸종위기에서 벗어났다고 그는 확신한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노력은 아니었다. 유명철 선생을 중심으로 한 남원농악 전수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원 농악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남원사람들은 상모놀이를 보면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데, 전주만 나가도 반응이 없어요. 그만큼 모르는 거죠. 남원농악을 더 많이 보게 하고 알리고, 가르쳐야만 남원농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포상모에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잖아요. 남원 농악이 세대를 이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해요.”
그는 호남 우도농악이 일찌감치 세련되게 가다듬는 노력을 통해 열두 발 상모를 도입하고 윗놀음을 했듯이 남원농악도 관객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원농악의 승부수는 개꼬리 상모와 즉흥연주다. 개꼬리 상모의 화려한 놀이와 통일성을 가미한 동작을 통해 절제된 시나위로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좌도농악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요. 지금의 판굿이 완성된 것은 100년도 안됐기 때문에 절대 훼손하지 말아야 할 전통은 아니잖아요. 농악이 예술적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현대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친 결과였어요.” 유명철 선생이 보유한 7~8시간짜리 공연 레퍼토리를 재현하고 재구성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출가를 불러 몸짓이나 대사를 만들고, 짜임새 있게 현대의 언어로 남원풍물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와의 마지막 이야기는 ‘쟁이론’이었다. 굿쟁이는 기량으로 말해야 한다고, 쟁이가 쟁이다우려면 테크닉이 있어야 하고 테크닉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량없이 엉뚱하게 포장하고, 입으로만 굿을 치는 사람을 경멸한다. 김덕수가 설장고를 획일화시켰다고 말하려면 김덕수보다 장고를 더 잘 친 후에야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 굿성, 굿쟁이론을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제도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창피하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창피한지, 정의감 투철한 청년은 반듯한 스승을 닮아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