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제보전화가 울린다. 격앙된 목소리다. 근처에서 터파기 공사를 하는데 집에 금이 갔단다. 공사장 주변에서 흔하게 제기되는 민원이다. ‘기사가 될까?’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간다. 객관성,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묻는다. 금이 간 곳이 집인지, 담장인지, 금은 언제부터 얼마나 갔는지, 집은 언제 지은 건지, 근처에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 인지, 공사 현장에서는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는지. 대답이 신통찮다. 공사하기 전엔 멀쩡했던 담장이 터파기 공사를 하면서 금이 간 건 맞지만 지은 지는 20년이 다 돼가고, 다른 집 상황은 잘 모르겠고, 현장에서 크랙 측정기(금이 얼마나 갔는지를 측정하는 도구)를 설치해놓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단다. 지은 지 20년이 다 돼 간다면 터파기 공사가 아니어도 얼마든 금이 갈 수 있다. 안방도 아니고, 담장에 생긴 균열 쯤은 당장 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공사 현장도 일단 ‘나 몰라라’하는 상황도 아니다. ‘얘기 안된다.’ 기사가 안된다는 얘기다. 적당히 끊으려는 내 반응이 못 미더웠는지, 상대는 다시 목소리를 높엿다. 공사가 계속되면 집 자체가 멍들어서(겉으로 표시는 안나지만 지반이 흔들려 내상을 입은 상태) 못 쓴다는 거다. 마감이 코앞인데 이 아저씨 말이 길어진다. 전화기를 반쯤 내려놓고, 쓰던 기사를 살펴본다. “일단 연락처 주시구요. 제가 좀 알아보고 다시 전화 드릴께요.” 끝.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타인의 안녕을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나 돌보고 살아야지 주제넘게 다른 사람의 안녕에 신경을 쓰다가는 자신도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자라면, 특히 나같은 사회부 기자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면서, 혹은 돌아보는 척하면서 ‘먹고 사는’ 직업이다. ‘품위있는 삶’이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돈없고, 빽없고, 그래서 억울해도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난 기자가 됐다. 적어도 한때는 그랬단 말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던가. 10여년 넘게 굴러먹으면서 이게 ‘기사가 될까, 안될까’만 따지는 눈치만 늘었다. 적어도 타인의 고통도 ‘기사 가치’가 있을 때만 응답했던 건 아닐까. 물론, 난 ‘희망 다큐’ 같은 곳에 나오는 딱한 처지의 이웃을 보면서도 곧잘 눈물을 흘린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4만 7천원을 보내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내 사회적 연대감에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한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불쌍함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는 그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일시적인 감정이입과 ‘빙의’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벗어나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바로 나는 그렇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감사와 안도감이다. <중략>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은 타자에 대해 아무리 강한 연민을 느끼더라도 타자와 자신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평등한 관계로 보지 않는다. 평등은 우정의 가장 중요한 전제다. 평등하지 않은 자들끼리는 우정을 나눌 수 없다.’
10년 넘게 ‘기자질’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취재원과 우정을 나눠 본 적이 있던가. 그들을 평등하게 대했던가, 난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라며 감사와 안도감에 빠져 있지는 않나.
책 곳곳에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있다. 저자는 밀양 송전탑을 예로 들며, ‘세상이란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인간은 남의 생명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일말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야차가 되고만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다. 백성의 한쪽은 먹이로, 다른 한쪽은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위험과 안전으로 양극화하여 통치하는 국가다’ 라고 일갈한다.
소통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란 그것이 공적이건 사적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국가의 대소사를 말로 해결하는 사회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법-법도 말로 되어 있다-보다 주먹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말로 하자’라는 근대의 이상은 이처럼 말에 대한 불신과 소비자 주의에 붕괴했다. 사실 말과 소통이 권력과 폭력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근대인들의 오만이고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중략> 사실 말이야말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람, 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폭력위에서만 폭력이 아닌 척 할 수 있는 사악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모범생의 또박또박한 말은 말로 취급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말은 말로 취급되지 않으며 ‘제대로 말하란 말이야’라는 면박, 즉 폭력만 당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저자는 바로 ‘말걸기’와 ‘경청’이라고 말한다. 경청을 단순히 ‘듣다’라는 수동성을 넘어, 지금까지 침묵하던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가 말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누군가의 경험과 견해가 이렇게 경청될 때만이 공적인 이슈, 비로소 ‘정치의 장’에 들어설 수 있다고 역설한다.
위도 여객선이 침몰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지 20년이 지났다. 또 어이없는 사고로 생때같은 아이들이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유럽 아이들도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랑스런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후진적인 사고가 벌어지다니. 사람들은 어쩌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어찌 이뿐이랴. 국가기관이 특정지역의 국민을 반대편으로 몰아세워도, 노골적으로 대선에 개입해도, 그 덕에 당선된 대통령이 여전히 60% 이상의 지지를 받는 이상한 나라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가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자존심 상할 일이 이뿐인가? 그래서 나는, ‘말걸기’와 ‘경청’이 유효한 방식인지, 사실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