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냥이, 사진작가는 못된다”며 사진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허철희(63세)를 사진가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 서울 충무로에서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며 부안의 자연과 삶, 문화를 사진으로 담고, 새만금간척사업 반대운동, 핵 폐기장 반대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부안학 연구단체인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를 맏고 있는 그를 사진가로만 부르기는 머쓱하기 때문이다. 2년만에 부안의 사진을 다 찍겠다며 내려온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부안 사진을 다 찍지 못했노라고 한탄하는 그를 그의 고향마을에서 만났다.
사진을 하게 된 동기 : 변산반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그가 태어난 곳이다. 고향인 부안은 사실 말로만 고향이었다. 몇 말의 쌀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하고 30여년 고향땅을 밟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늦깎이 공부를 하고 광고기획사는 열었다. 일의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진인지라, 경비를 절감하자는 생각으로 사진을 배울 것을 생각했다. 사업을 접고 아트디렉터 밑으로 가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군대 갈 무렵까지 사진을 찍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사진이 남자가 해야 할 일인가 싶었죠. 기획사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사진에서부터 디자인까지 하나로 완성하는 것이다 싶었어요.”
얼추 사진을 배웠을 무렵, 그는 독립해서 사무실 한켠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상업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 사진은 귀했고 그의 선택은 사업적 성공을 가져왔다. 자그마한 기획사였지만 의류전문 광고기획사로 충무로에서는 “허철희가 충무로 돈 다 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고향은 고향이었던지, 88년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며, 그에게 부안 사진 있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진작가도 아니었고, 필요에 의해 사진을 찍었던 그가 ‘사진을 해야 겠다’ 마음을 먹게 한 계기였다. “자꾸 고향 쪽을 바라보게 할 무렵이었어요. 신경을 써야 겠다 생각을 했죠. 하지만 어린 마음에 달력에 쓸 예쁜 사진만을 생각했죠. 마침 부안군에서도 홍보책자 의뢰가 들어와서 변산반도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여유가 있을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부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2년 정도 부안 사진을 찍고 “변산반도 사진 좀 있다”고 자랑도 했다. 그 무렵 IMF에 직격탄을 맞은 업체들이 부도가 나면서 그는 사업을 크게 줄이고 부안에 머무는 시간들을 늘렸다. 고향에 내려와서도 그는 여전히 비즈니스맨이었다. 지자체들의 홍보전략을 세워주고 전북의 사진을 담아 지자체 홍보책자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고향을 지키며 유기농을 하는 어린 후배들을 보며 새로운 생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생활들이 고향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상한 것이 돼갔다. “양복입고 군청에 드나드는 일이 자꾸 어색해지고, 논두렁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몸에 배기 시작했어요. 내가 자본주의의 못된 가치관으로 살고 있었구나, 도시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부끄러운 사진가의 자각 : 부안댐
그러던 96년 어느 날, 부안댐이 지어지고 수많은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부끄러웠다. 바보구나, 생각했다. “마을 십여 개가 잠기고 생활사가 물에 잠겼는데 사진가로서 내가 뭐했나 하는 자문을 하게 됐어요. 수박 겉핥기식으로 풍경만 찍었지, 사람 사는 풍경을 찍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죠. 사진하기가 싫었어요.” 그후로 그는 부안을 사진에 담는 일을 중단했다.
2년도 채 되기도 전에, 시화호에서 해양생물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모습이 새만금과 겹쳤다. 부안댐과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새만금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당시 새만금은 부안에서 ‘지상명령’ 같은 것이었어요. 시민운동이 뭔지도 몰랐지만, 새만금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부안의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죠.”
때마침 젊은 친구들이 부안의 자치, 환경, 문화, 역사를 아우르는 건전한 시민단체를 설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부안을 이야기해보자며 부안시민문화모임이 먼저 만들어졌다. 새만금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 갑론을박을 했다. 새만금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그를 비롯해 신형록, 김종성, 김영표, 김인택 등이 여기에 속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기로 했어요. 새만금의 본질을 파헤쳐 군민들에게 알리는 방법들을 모색했어요.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과 연대를 하면서도 환경단체의 목소리가 아니라 부안군민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큰 줄기도 잡았죠.”
천년의 약속 : 매향제
그들 몇몇은 새천년이 밝아 오는 해, 매향제를 기획했다. 향나무를 묻은 후 천년이 지나면 침향이라는 최고의 향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의 매향은 천년의 약속이다. 그들은 매향제를 통해 천년이 지난 후에도 갯벌은 갯벌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다. 매향제를 지냈지만, 그건 일회성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매향비를 길가에 세웠는데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해창을 안티새만금의 메카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매향제를 진행했는데 잘 안됐죠. 어떻게 이곳을 알릴까 궁리를 하다 갯벌에 장승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들물 때는 장승이 잠기고 썰물 때는 장승이 드러나는... 10개 정도만 세워도 표시가 나지 않겠냐며 장승 세우기를 진행했죠.”
몇몇 사람으로 장승 10개를 세운다는 것도 버거운 터였다. 그러다 부안을 찾은 최병수 작가와 술을 마시다 장승이야기를 했다. 다음날, 최 작가는 “선생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하며 그에게 스케치북을 보여줬다. 스케치북에는 80개가 넘는 장승이 갯벌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많은 장승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리는 80개가 넘는 장승을 세울 힘이 없다고 했다. 최 작가는 “그냥 해요” 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목재를 보내주고, 전북대 총학생회에서 사람을 붙여줬다. 장승을 깎는 돈지는 일주일이 넘게 나무 깎는 소리가 들렸고 불도 꺼지지 않았다. 새천년 1월 매향제를 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해창에 80여기의 장승이 세워졌다. 그의 바람대로 해창은 안티새만금의 메카가 되었다. 문규현 신부가 합류하며 안티 새만금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참여인원도 많아졌다. 하지만 디자인 하나라도 다른 곳에 예속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부안 사람들이 중심을 잡았다. 새만금 반대 로고도 박홍규 화가가 그린 농발게를 활용해 그들이 직접 제작했다. 그 후 핵폐기장에서도 그렇고 부안의 상징색이 된 ‘노랑바탕’의 시작도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부끄럽지 않는 사진쟁이의 길 : 갯벌
하지만 그의 작업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끄럽지 않은 사진쟁이의 길은 무엇인가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길에 새만금이 있었던 겁니다.” 새만금의 반대 목소리를 내는 틈틈이 갯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줄포만에서 군산까지 갯벌과 그 갯벌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지금도 부안의 갯벌을 생각하면 하나의 생태지도가 그려질 정도로 5년간 무던히도 갯벌을 들락거렸다.
“어렸을 때 갯벌이 놀이터였잖아요. 공부하다보면 어렸을 때 봤던 것들이 나와서 쉽게 알겠더라고요. 물때에 따라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꿸 수 있었어요.”
사진작업과는 별개로, 끝나지 않을 싸움에 지쳐갔다. 2002년 새만금 공사가 다시 시작될 무렵, 그는 먹고 살길을 걱정해야 했다. 가족회의가 열렸고 서울로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먹는 것 거칠고 잠잘 곳도 없었지만 편안했던 부안이 그리웠다. 차 몰고 넥타이 메고 사는 서울 사람들을 보며 ‘저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나’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울은 딴 세상 같았다. 그럭저럭 서울에 적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다. “부안21 홈페이지를 열었는데 거기에 고창 핵폐기장 문제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그 불똥이 부안으로 튀는 거예요. 서울로 간지 채 1년도 안되서 약속을 어기고 다시 부안으로 내려왔죠.”
부안의 문화 역사의 기록 : 부안학
핵폐기장 반대 운동에서 그는 부안의 힘을 봤다. 유명인사들의 생태, 역사, 환경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부안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 앎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부안에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의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지금도 그는 그때의 ‘반핵 결집력’만 표출되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곳이 부안이라고 확신한다. 그 현장에서 그는 부안의 힘을, 부안의 아픔을 기록했다. 새만금에서 핵폐기장까지, 그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환경미술 물전, 이듬해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갯벌의 소중함과 반핵에 대한 사진을 전시하게 된 것은 부안을 사진으로 모두 담아보자는 작업의 결과였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끝나고 그는 부안의 생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갯벌생태는 기록했으니, 이제 내륙 쪽 생태를 조사해보자고 했다. 혼자 산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은 백과사전을 보고 이름을 기록했다. 공부가 밑도 끝도 없었다. 그와 만난 그날도 새로운 꽃이 폈다는 소식을 듣고 온 터였다. “부안을 생태의 보고라고 해요. 부안에 자생하는 식물들이 800여종 있다고 하는데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아요. 내 파일만 보더라도 1천여 종이 넘으니까요. 보고되지 않은 종도 50여 가지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현장을 돌면서 그가 본 부안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사진을 찍을 때 부분을 나눠 찍기도 하며 세세한 기록에도 힘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안은 선사시대 이래 갯벌에 의지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옛날 양반이나 선비들에 대한 것은 비석 하나까지 찾아내는데, 뱃놈들의 역사는 없단 말입니다. 부안의 해양문화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을 중심으로 영상, 문헌을 확보해 부안이 가진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것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아카이브에 담을 계획이다. 정리를 못해 발표도 못하고 있는 수많은 생태의 기록을 비롯해 문화유산, 향토역사 등 부안의 이야기가 담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꿈꾸는부안 : 생태마을
그에게는 부안은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생태계의 보고인 갯벌이 사막이 되고 거기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본 후로 그 현장을 다시 보는 것을 꺼리게 됐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는 고향을 드나들 때 산길을 이용한다. 사막이 된 갯벌을 보는 것도, 깎여지는 산허리를 보는 것도 그에게는 고역인 탓이다. “새만금 활동을 할 때만 해도 공무원들은 ‘생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생태를 남발해요. 웰빙다, 힐링다, 잡소리를 늘어놓는데 이곳에서 유기농을 하며 사는 친구들에게는 그냥 자연스런 삶이예요. 그런 삶이 몸에 배어 있는 거죠. 하지만 해안도로를 내느라 산을 깎는 것이 웰빙, 힐링인가요?”
핵폐기장 이후 부안살이를 바꾸자 했을 때 어떤 이는 에너지 자립마을을, 어떤 이는 생태적인 삶을 선택했다. 그래서 부안을 친환경적 삶을 사는 것을 배우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 멀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격포항에 폐전함이 등장하고, 곰소항에는 F15전투기의 미니어처가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더 늦기 전에 부안의 상황을 이해하고 부안의 정체성을 바로 찾아가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했다. “자꾸 개발 지향적으로 가는데, 부안은 역사, 문화, 생태를 바탕에 두고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생태공간에서 도시민들에게 먹거리와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민들이 여기에 올 때는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인심을 얻으러 오는 것이지 큰 건물과, 넓게 닦인 도로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가 꿈꾸는 부안의 내일은 밝아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