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문화저널]
저널여정
고부봉기, 민초들의 숨결
만석보와 말목장터를 찾아
강영례 문화저널 간사(2003-09-15 14:35:52)
신태인에서 30여분 도로를 따라 걸어서 도착한 만석보는 그 날의 함성과 울분을 간직한 채 말없이 넓은 평야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수의 넓이가 40리나 되었다던 만석보 제방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유지비에 서서 보니 배들평야가 한눈에 내다보인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인 1894년 1월 9일 시퍼런 죽창을 하늘로 치켜든 농민군들이 말목장터에 모였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논에 물을 대지 못해 추수는 커녕 끼니 잇기도 어려운 형편에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상류에 멀쩡한 보를 두고도 그 밑에다 새 보를 막아 허구헌날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사역을 시키는가 하면 그 보를 쌓기 위해 남의 선산에 있는 수백년 묵은 나무를 마구 베어다 사용하였다. 그 해 홍수로 봇물이 들판으로 흘러 넘쳐 벼들이 몽땅 물에 잠기었는데도 조병갑은 오히려 전에 없던 터무니없는 많은 수세를 농민들에게 억지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당시 7백여 석의 엄청난 수세를 거두어들였던 평야가 바로 동진강의 남쪽에 있는 배들평야로 갑오농민혁명의 들불을 밝힌 곳이다. 이 들녘을 가로지르며 노령산맥의 서쪽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들이 서해로 흘러드는데 이 강이 바로 동진강이다. 배들평야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이 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바로 위에 큰 보를 막아서 그 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만석보라는 이름은 만석이 나는 배들에 물을 대는 보라는 뜻이다.
1893년 조병갑이 새보를 쌓기 시작하자 가장 피해가 심했던 이 배들(이평면)에 사는 농민들이 전봉준을 선두로 몰려가 두 차례에 걸쳐 수세감면 요청을 했으나 그는 오히려 관청에 반항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탄압하였다.
정읍군 이평명 하송리(구 팔선리). 신태인에서 말목장터에 이르기전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은 옛날에 만석보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1973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진강 상류에 유적비를 세워 「만석보유지비」만이 그 날의 역사를 말해줄 뿐 고부봉기를 유발시킨 조병갑의 수탈의 상징물인 만석보는 현재 남아 전해지지 않는다. 백년전 피끓는 분노로 고부관아로 달려간 성난 농민군들이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가혹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그 흙탕물
어찌 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봇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 양성우 「만석보」중에서 -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울분을 참지 못한 전봉준은 이 일대 농민들을 말목장터에 모이게 하였다. 조병갑을 몰아내기 위해 고부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전봉준은 이날 밤 집회를 가진 후 농민군들을 두 패로 나누어 부근 민가에 미리 준비해둔 죽창 수백 개로 무장시키고 대오를 정비한 다음 고부군아로 향하였다.
신태인에서 예동을 거쳐 버스를 내리면 장터 삼거리 부근에 직경이 2m나 되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와 만난다. 바로 이곳이 조병갑을 응징하기 위해 농민군들이 집결했던 말목장터이다.
푸르게 시린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이 감나무는 갑오년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창이던 석축공사가 끝나고 주위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북으로는 백산, 서남쪽으로는 고부관아, 동쪽으로는 신태인, 남쪽으로는 정주가 있는 중앙상단에 위치한 이곳은 그 당시 지리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정읍군 이평면 두지리에 위치하는 말목장터는 갑오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로부터는 남쪽으로 약 3Km정도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