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청춘
인생은 연극, 세상은 무대
극작가 최김병주
연극이란 작가가 쓴 희곡을 무대 위에서 자기의 온몸을 통해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이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순수예술인 연극은 흔히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경제적 가치만이 중시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연극에 몸담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지역 연극판을 떠나지 않고 활동 중인 젊은 극작가 최김병주를 만나보았다.
시를 쓰던 평범한 학생, 무대를 꿈꾸다
학창시절 그는 문학소년이자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교내 문학동아리에서 시를 쓰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공부하고, 대학갈 준비를 하던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는 수험생이었다. 고3 때, 그의 담임선생님이 물었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그는 용수철처럼 희곡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희곡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연극을 보고 결심한 것이 아닌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때문이었어요.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영화처럼 아주 현실적이지도 않고 시처럼 문학적이지도 않은 현실성과 문학성의 중간에 있는 대사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함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때부터 연출과 작가 그리고 배우를 아우르는 공연예술가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수능 성적은 그의 뜻대로 나오질 않았고, 점수에 맞춰 아주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희곡을 쓰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문학동아리 소금꽃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는 사회에 나가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시를 써서 돈을 버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KBS방송아카데미에서 호영옥 선생님의 드라마 극본수업을 1년간 들었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드라마 극본 공모에도 몇차례 공모를 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어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너는 드라마보다 연극무대가 더 어울린다고.”
그렇게 연극무대로 돌아가기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 서울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 고은설 씨를 만났다. 한일고등학교 같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던 그들은 대학로에서 후배가 출연했던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를 같이 보게 되었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극작가가 아닌 배우로 무대에 처음 서다
연극에 미쳐 평생을 무대에서 살겠다는 연극쟁이들 사이에 피해야 할 하나가 있다면 ‘연극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포기한 자신은 그렇다 쳐도 배우자까지 연극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가는 평생 궁핍함에 허덕일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결심이나 망설임도 ‘사랑’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그날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전주에 내려와 아내와 함께 창작극회 오디션을 봤고, 둘 다 합격해 2009년 12월부터 극단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극단에 입단해서 작품부터 바로 쓰진 않았어요. 처음 시작은 2010년 ‘광팔자’라는 작품에서 캄보디아 이주 노동자 역할로 첫 데뷔를 하게 되었어요. 창작극회에서 배우훈련을 거치면서 무대 메커니즘이 뭔지 알겠더라구요. 그동안 시를 쓰고, 드라마 극본을 썼던 일이 연극배우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인생에 있어 필요 없는 시간은 없음을 배우생활을 통해 느끼면서, 그는 창작극회에서 여러 워크샵과 활동들을 거치면서 배우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작품에 배우로 무대에 섰다. 기획자로서 연극 홍보부터 마케팅 기획, 공연에 관련된 기본적인 무대기술과 음향지식도 익혔다. 극단 전체의 일을 두루두루 거치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작품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지역에서 하나만 하면 도태돼요. 다른 친구들도 배우만 하는 경우는 없어요. 배우를 하면서 스텝도 같이 병행하는 경우가 많죠.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만 경쟁력도 생기고,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는 흥부전을 각색한 아동극 <지지배배 지지배배>를 시작으로, 노송동 주민센터에 성탄절을 전후로 수백만원을 전달하는 ‘얼굴없는 천사’ 이야기를 다룬 <노송동 엔젤>, 노무현 노제 시극<노오란 풍선>, 서동축제 주제극 <무왕의 꿈>, 전국연극제 개막공연 <진포의 꿈> 등 해마다 한 작품씩 꾸준히 무대에 올렸다.
연극인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는 ‘최’와 ‘김’ 부모님 성(姓) 모두 따른다. 10여년 전만해도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통해 두 글자 성을 경우는 흔치 않았다. 법적으로 두 글자 성을 만들 수 없기도 하였고, 성을 붙여 세 글자짜리 이름으로 개명 신청하는 절차가 복잡하기도 했다. 그래서 주민등록상으로는 본래의 이름을 쓰지만 사회적 이름으로 ‘최김병주’를 고집해 쓰고 있다. 혹자는 남들보다 좀 튀어보려고 두가지 성을 쓰는 것은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는 대학 시절 ‘여성정치’ 강의를 들으면서 ‘달빛아래 춤추는 여우들’이라는 여성학연구학회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양성평등 운동을 조금씩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서 직업과 제 자신 사이에서 많은 괴리감이 생기더라구요. 솔직히 연극인으로서 아빠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란 굉장히 힘들어요. 연습이나 공연이 있을 때 아빠와 연극인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겪죠. 연습이나 공연을 마치고뒷풀이 가기가 힘들어요. 술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술자리에 거의 못 가요.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야하니까요. 그래서 인맥이 짧아요.”
그에게 연극은 그저 직업이다. 그는 말했다. 잘해야 하고, 잘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여기에 더해 약간의 욕심과 사명감도 있다.
“창작극회 홍석찬 대표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연극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 연극만 좇으면 금방 무대를 떠나게 된다.’ 사실 연극판에서 일하는 사람들 1년 연봉을 따져보면 1000만원에서 1500만원 남짓이에요. 그 정도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젊은 배우들도 많아요. 생활하기 힘들죠. 또, 사람이 많지도 않아요. 극단에서 공연되는 작품을 위해 배우 토양자체가 두터워야 하는데 다들 서울로 떠나니까.”
군산은 예술의전당이 생기기 전까지 공연을 접하기 어려웠고, 아직까지는 전주 위주로 문화예술 전시나 공연이 많이 편중되어 있다. 그는 창작극회를 떠나 지난해부터 극단 둥당애에서 활동하고 있다. 극단 둥당애는 생긴지 4년밖에 안된 신생 극단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군산에서 연극활동을 하는 것이 기회이자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요즘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마당극이다. 많은 마당극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마당극의 생명력이 짧다. 그는 전라도 특유의 정서와 해학이 묻어나는 마당극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10년, 20년씩 지속되는 생명력이 긴 마당극을 만들고 싶어요. 또 실험적인 단막극도 무대에 올려보고 싶구요. 무대 위에서 연극의 형태를 파괴할 수 있는 큰 작품, 해외무대에 나갈 수 있는 작품도 만들고 싶어요.”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막상 직업이 되었을 때 밥벌이가 되기 전보다 진심으로 즐기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일이 되는 순간 책임감과 함께 참아내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그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가 한 말인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처럼 생각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일까. 별의별 예술기획연구소에서 기획실장으로 아내와 함께 재밌는 일을 모색하고, 군산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선보일 그의 앞날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