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지휘자 유수영
활대를 놀리는 고사리 손, 목청을 가다듬는 엄마, 펜 대신 오보에를 잡은 아빠. 연습실 가득 모인 가족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지휘자 손끝이 올라가고 연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음악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마뜩치 않은 표정의 지휘자가 두 마디, 세 마디를 다시 반복시키지만 썩 듣기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지휘자는 단상을 내려와 파트별로 세심하게 지적을 해준다. “여기는 이렇게 해” 하며 바이올린을 짚어들고, 합창단 앞에서는 안되는 부분을 지적하며 직접 노래를 부른다. 여기는 가족오케스트라·합창단 ‘완두콩’의 연습실이다. 그리고 지휘자는 유수영이다.
‘완두콩’은 물론이고 도립어린이교향악단, 클나무청소년오케스트라 등 그가 지휘를 맡고 있는 단체들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전문 지휘자’가 아닐까 싶게 아이들이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도맡았다. 그래서 그는 지휘자이면서 교육자다. 낯을 낼 수 있는 자리도, 음악적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도 아니지만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다.
아이들로 시작하고 아이들과 함께 음악인생을 걷는 지휘자 유수영. 지난 11년동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친 것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했다고 했다. 교학상장의 시간, 음악가의 길보다 교육자의 길이 좋다는 지휘자 유수영을 만났다.
세계 유일의 교향악단에서 지휘봉을 잡다
그가 음악을 접한 것은 일곱 살 때다. 어머니가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피아노, 바이올린을 쳤다.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연습할 때면, 그 소리에 끌려 주위를 맴돌았다. “너도 이거 해볼래?”라고 어머니는 물었고, “응 하고 싶어”라고 대답한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날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사왔고 그는 그렇게 바이올린과 만났다. “열심히는 안했어요. 엄하게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음대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여전히 음악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냥, 큰아들이다 보니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유학을 결심한 것도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다. ‘온달왕자’를 만들겠다는 아내의 권유였다. 2월 졸업, 3월 결혼의 일정을 후다닥 마치고 5월 아내와 유학길에 올랐다. 98년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때였지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강행했다. 아내는 공부에 대한 열정과 무대에 대한 꿈이 컸다. 그 꿈을 위해 2세 계획도 미룬 채 6년 유학생활을 마쳤다. “한국에서는 바이올린을 전공했었고, 유학 생활 동안 바이올린과 지휘를 함께 했어요. 하지만 두 가지에 열정을 나누는 것보다 한 길로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옮기며 지휘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행복하게 잘 할 수 있는 것이 지휘였으니까요.”
한국에 돌아 왔지만 지휘자로 역량을 펼칠 그의 자리는 없었다.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서른 초반의 ‘새파란 지휘자’에게 지휘봉을 맡길 정도로 한국 사회는 녹록치 않았다. 그쯤 전북 어린이교향악단 지휘자 공채에 응모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일단 젊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 해보라, 부담이 없지 않느냐, 훈련한다는 생각으로 해보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유학까지 갔다 왔는데 어린이를 가르쳐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주위의 권유와 조언을 받아들여 2004년 어린이교향악단 공채에 합격했다. “와서 보니 아이들 수준이 프로 못지않아서 깜짝 놀랐어요. 내가 생각했던 그런 단체가 아니었더라고요. 이런 단체가 또 있나 싶어 인터넷을 뒤졌어요. 전체편성이 돼 있는 관립단체로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향악단이 전북어린이교향악단이더군요. 파리나무나 빈소년처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지역에서 음악적으로 좋은 초석이 될 수 있는 단체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어요.”
지금도 전북어린이교향악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가 처음 지휘봉을 잡았을 때는 여건도 열악했다. 지휘자, 선생님에 대한 대우뿐만 아니라 환경, 기자재, 시설물 등 기본적인 것도 갖춰지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야외에서 파트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고 비오는 날 처마 밑에서 연습을 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일 년에 6~7회의 공연을 통해 단체를 알리고 전북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가장 먼저 해결한 것이 여건들을 갖추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어린이회관에 연습실도 마련되고, 선생님들의 대우도 많이 개선돼 격세지감을 느껴요. 하지만 아직까지 어린이교향악단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 같아 아쉬워요. 서울에 이런 단체가 있었다면 크게 알려졌을 건데 하는 생각도 해요.”
기다려 줄 수 있는 지휘자가 되다
그렇게 교향악단의 지휘봉을 잡은 지 11년이 됐다. 창단 초기 4년을 제외하곤 어린이교향악단의 역사가 그의 인생이 됐다. 500여명의 아이들을 배출하고 단원이었던 아이가 선생님으로 오케스트라에 합류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5번의 재계약을 해야 했다. 연임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더 큰 욕심을 내지 않았던 마음”에 있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오케스트라에 머무는 동안 아이들이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음악을 즐기고, 음악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배워 졸업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버릴 것은 버리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아이들과 음악하고 행정과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휘자의 권한을 내세우기보다 단순하고 겸손하게 해오니 다들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나름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이렇게 하니 이런 반응을 보이고 해결되는구나, 이건 안 되는 구나하는 노하우들이 그의 습관으로 쌓였다. 잘 배울 수 있게 아이들을 즐겁게 해줬다. 실력도 늘고 소극적으로 되지 않게 채찍과 당근도 적절하게 섞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세대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노력하는 것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다. “갈수록 세대차가 나요.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엑스오, 인피니티, 에이오에이의 구성원을 기억하고 노래를 들어요. 아내가 나이에 맞지 않게 그런 걸 보냐고 하고, 노래를 듣는 게 지치게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들이라 챙겨야 해요. 연습하다 막히면 이런 이야기들로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야 하거든요.”
의외의 복병도 있었다. 어린이교향악단의 학부모들이다. 학부모들의 입김이 너무 새, 그의 말에 의하면 ‘태풍’이었다고 한다. 마치 그가 학부모들의 직원 같았다. 그 학부모들과 오케스트라단을 분리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 5년이었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적절하게 조정해 기분 나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타협이 됐다. 오히려 요즘은 그를 너무 어렵게 대하는 학부모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초기의 힘들었던 기억으로 펼친 ‘가혹한 쇄국정책’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요즘이다.
꼬인 실타래처럼, 어느 하나 쉽게 터득되는 법이 없는 것이 그의 일인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십년 노하우’로 요즘은 어려운 일도 아이스크림 녹듯 녹아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심이 핵심이었다. “아이, 학부모, 선생님, 그리고 저도 목표는 같잖아요. 억지로 꼬인 걸 푸는 게 아니라 그저 기다려주는 것만 잘하면 되더라고요. 리더니까, 더 여유롭게 기다려주면 알아서 잘 한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으로 터득했어요.” 이런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그가 배운 것도 많다. 정직 성실 순수,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하며 그는 일에 대한 것보다 한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을 배웠다. 전북어린이교향악단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이 마음에 감격해 이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의 상태를 표현할 만한 사자성어 ‘교학상장’을 찾아내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알려주고 다녔다.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성장하는 어린이교향악단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음악으로 치유하는 길을 발견하다
지난해부터 그의 바쁜 일정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가족오케스트라·합창단 ‘완두콩’의 지휘를 맡은 것이다. 완두콩은 어린이교향악단과 또 달랐다. 사춘기의 아이, 가족과 대화하지 않는 아빠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왔다. 데면데면한 가족들은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쳐달라”는 주문을 그에게 했다. 음악을 알려주러 왔는데 치유해달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처음 몇 개월간 진짜 힘들었어요. 음악의 질을 보고 온 게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온 사람들 이었는데 최고만을 요구했으니 저도 불행하고 가족들도 불행했던 거죠. 그걸 알아내는데 3개월이 걸렸어요. 하나 둘 내려놓자, 가장 골치 아프면서도 재미있는 곳이 됐어요. 음악치료라는 것이 이래서 생긴 것이구나, ‘완두콩’을 하면서 깨달았죠.”
2기째를 맞은 가족오케스트라·합창단 ‘완두콩’을 가르치며, 그는 “이것도 의미 있는 일이구나”하고 있다. 음악 실력이 향상되는 것보다는 가족끼리 만나서 연습하고, 교류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1기 가족들이 빠지지 않아 2기를 많이 뽑지 못했을 정도로 가족들의 참여의지도 높아졌다. 가장 큰 변화는 아빠들에게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가족 손에 억지로 끌려나온 아빠들이 100점짜리가 됐다고 생각한다. “6개월 ‘완두콩’을 하면서, 46세에 술 마시는 것보다 음악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닫고 아이와 함께 연습하며 대화할 수 있게 됐고, 개인 레슨을 받는 아빠들이 생겨났어요. 이제 아이들의 얼굴이 밟혀서 밖에 못 있겠다는 아빠도 있고, 같이 있으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니 음악이 큰 변화를 만든 거죠. 음악으로 가족의 의미를 찾는 ‘완두콩’같은 단체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가족오케스트라·합창단 ‘완두콩’은 이달 공연을 앞두고 맹연습중이다. 여전히 음악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아 그의 마음은 바쁘다.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적인 완성도도 중요한 터라 요즘 그는 가족들에게 ‘기분 좋은 스트레스’를 준다. 최선을 다한 무대를 통해 서로 다르지만 닮은 꼬투리의 콩처럼 ‘완두콩’ 가족이 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꼬투리를 벗어나 부쩍 성장한 콩알들이 새싹을 틔울 수 있도록 그의 지휘봉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어린이를 생각하는 교육자가 되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은 그를 ‘어린이 전문 지휘자’로 만들었다. 기량이 뛰어난 프로 연주자들과 더 좋은 연주를 하는 게 나을 법도 하지만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보람 있다고 한다. 그런 배경에는 그의 가족사가 있었다. 부모님이 고등학교 때 이혼하며 그는 한동안 방황을 해야 했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내면 어디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맡은 단체의 아이들에게 그가 받지 못한 사랑을, 음악을 통해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아들 녀석 때문에 꺼냈어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이와 함께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됐습니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더 행복해요. 제 아버지에 대한 아쉬운 기억때문인가 봐요. 아이가 음악을 통해 행복하고, 좋은 아버지로 저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겠죠.”
그러나 그의 마음처럼 현실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10년을 겪으면서 어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린이교향악단이 자리한 어린이회관 ‘어린이헌장비’에는 어린이들이 좋은 환경 속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적혀있다. 매번 어린이교향악단을 찾을 때마다 어린이헌장을 읽지만 마음만 아프다. 어른들이 비에 적힌 내용을 지켜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어린이교향악단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휘를 할 수 있게 해준 뿌리를 버릴 수는 없었다. “프로로 성장한 아이들을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만났는데 뭉클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게 남아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제 의무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 이상 해줄 게 없을 때 그때는 스스로 물러설 생각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애정은 더 커지네요.”
그에게는 하나의 큰 꿈이 있다. 그의 음악적 한계를 올리는 것이 아닌, 교육자로서의 꿈이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내내 생각했던 어린이예술학교 설립이다.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조기에 발굴해 그 재능을 체계적으로 키워주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어린이예술학교라고 그는 생각한다. “중고, 대학교는 예술학교가 있는데 초등학교는 없잖아요. 뒤늦게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등학교 때 다시 음악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야 늦은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겠죠.”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뿐이다. 학업과 예능이 따로가 아님을, 그리고 음악이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나는 자양분임을 어른들이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음악은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훌륭한 아이들을 길러낼 수 있어요.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들은 음악을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오케스트라는 개인을 전체와 조화롭게 연주할 때만이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화합하고 협동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장을 어른들이 만들어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