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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한국인답게 살 수 있는 우리 문화의 정수를 기록합니다
지리산 문화디자이너 김용근
이세영 편집팀장(2014-09-02 11:01:19)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별난 사람이었다. 스스로 괴짜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판소리와 지리산에 푹 빠져 살았다. 직업은 공무원이지만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소장인 김용근(55) 씨의 삶은 지리산 구전문화를 기록하는 것으로 점철돼 있다. 워낙 다방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 그인지라 하는 일도 직함도 여러 개다. 그중에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지리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60여명의 사람들이 붙여준 ‘지리산문화 디자이너’다. 


감성적 유전자, 소의 언어를 밝혀내다

79년 남원농고를 졸업한 친구들이 도회지로 떠났지만 공부에 재주를 보이지 못했던 그는 남원에 남았다. 그가 먹고 사는 방법은 농사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이 대학을 진학하고 홀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는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렇게 그는 그의 가족이 대대로 남원에 살았던 것처럼 남원토박이가 됐다. 시골에서 줄곧 살았던 그는 감성적 유전자를 그대로 지니고 자랐다고 했다.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것을 봤어요. 국악원에서 노래하는 것, 농사짓는 것, 장날 할머니들이 장사하는 것을 봤죠. 감성적 유전자를 그대로 지니고 자랐던 거죠. 요즘 교육이 그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도시서는 이런 것을 볼 수 없잖아요.”

아버지와 농사를 지으며 그 주변에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람들의 유전자 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들이었다. 옛날이야기 듣듯 노인들의 농축된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리산에 구전으로 이어져오는 자원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는 판소리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인 연구소였다. 그가 ‘판소리문화연구소’라고 박힌 명함을 들고 다니던 80년 무렵은 콘텐츠의 개념이 확고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별것 아닌 ‘사실’들이었지만 그는 노인들의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감성적 유전자가 그것을 알아챘다.

“말로 전해지지 않고 눈빛으로 전해지는 것들, 그저 보고 배우는 것들이 많았던 때였죠. 지리산 주변 600개의 마을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들을 수집했어요. 수집해 오는 단계의 일을 하면서 가공하고 활용할 기술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네트워크와 연구소 기능이 필요했어요. 축적하고 분류하고 상품으로 가공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 무렵 그가 조사했던 ‘소언어 사전’은 그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쟁기질로 농사를 짓던 시절, 소를 속여서 팔았다며 싸우는 현장을 목격했다. 전라도에서는 일을 잘하던 소가 경상도로 가서는 일을 못한다는 것을 알아낸 그는 이유를 찾았다. 언어의 차이였다. 소를 부릴 때 남원에서는 ‘이랴, 자라자라, 워워’ 하는데 경상도는 달랐으니 소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소를 부리는 말들을 조사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했다. 괴짜는 괴짜였다.


북을 만들기 위해 판소리를 배우다

그래도 연구소 이름을 판소리문화연구소였으니 중심에 있었던 것은 판소리였다.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은 ‘북’이었다. 북에 대한 관심은 북을 만들었던 아버지로부터 나왔다. 판소리꾼의 북을 만들어주던 아버지는 북을 찾지 않자 그 기술로 틈틈이 생활도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 그의 아버지를 보며 자란 그는 북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했다. 

“북은 통나무를 손으로 깎아서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만드는 것을 보고 알았죠. 아버지는 강동원 명창의 북도 만들었는데, 70년대 들어서는 하나도 안 만들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봤는데 학교 졸업하고는 만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 거죠. 아버지 연장남 고스란히 남았는데, 북을 다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북이 어떤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 북은 경상도 하동, 서울 동숭동, 전라도 남원에서 북을 만들었다. 하동은 소가죽이 가장 많이 거래되던 곳이었고 동숭동과 남원은 도축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만들던 북의 쓰임새는 조금씩 달랐다. 동숭동은 풍물북을, 하동은 농악북을, 남원은 판소리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곳에서 만들던 북을 조사하면서 지금 쓰는 판소리 북은 우리 북이 아니라 일본식 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판자를 이어서 붙이는 쪽북이 아닌 통나무북과 북의 양쪽 가죽에 삼태극이 그려져야 우리 판소리 북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판소리꾼의 소리가 다르듯이 북도 다 달랐어요. 고수가 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이 자신의 북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이유죠. 북 제작자가 소리꾼의 소리를 듣고 그에게 맞는 북을 만들어줬던 겁니다. 소리꾼의 상중하청에 맞게 통나무를 파내는 모양이 달랐던 거죠. 굉장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맞춤북을 만들었던 거죠.” 

귀명창이 많은 남원에서 판소리 북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북을 만들 수 있었으니, 남원은 판소리 북을 만드는 가장 적지가 되었을 테다. 그런 사실은 남원 명인명창의 출생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원의 명인명창 28명 중 4명을 제외하고는 남원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북을 만들러 와서 남원에 정착했던 사람들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도 그가 북을 만들 수는 없었다.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맞게 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때부터 그는 남원 국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근처로 이사를 갔다. 저녁마다 명창들이 하는 공연을 들으며 8년을 살았다. 판소리를 공연하는 곳이면 전국을 다녔고, 명창들의 하계수련 장소까지 따라다니며 귀를 틔게 했다. 

북을 만들기 위해 듣고 배운 소리는 180개의 음역을 감지할 정도의 귀명창으로 그를 만들었고, 흥부가 완창을 할 수 있는 실력을 쌓게 했다. 그렇게 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지 15년 만에 그는 판소리 북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북을 만들어 달라는 사람은 있는데 북을 맞추러 오지는 않아요. 그 사람 북이 아닌 걸 어떻게 만들어줘요. 북과 명창이 함께 가게 한다면 모를까 북 맞추러 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북과 명창이 함께 가야 하는데 북은 사라지고 명창만 남았으니 절름발이가 된 것이죠.” 여전히 판소리 북에 대한 낮은 관심이 그는 아쉽기만 하다.



명창호적부로 판소리 가계도를 완성하다

판소리 북을 찾아다닌 시간은 소리꾼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북을 누구부터 썼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고, 소리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명창이 살았던 마을을 조사하고, 면사무소마다 돌아다니며 호적을 찾아냈다. 찾아진 자료를 기점으로 선대로 후대로 명창들의 가계를 조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명창호적부다. 

30년 동안 그가 찾은 자료는 1천 페이지 분량의 책 3권으로 엮였다. 이 책에는 명창들의 호적부터 노인들의 이야기, 가계도, 일제시대 범죄기록부까지 명창과 관련된 자료가 빼곡하게 담겨있다. 명창호적부가 3권의 책으로 정리됐지만 그와 관련된 자료는 여전히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다 점령하고 있을 정도다.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조사된 자료를 검색이 가능한 컴퓨터 파일 형태로 변환하고 최근에는 4600개의 녹음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었다.

소리꾼에 대한 조사로 판소리 유적지가 저절로 밝혀지기도 했다. 구례에서 송만갑의 호적을 찾은 후 그 기록을 기초로 전국을 뒤지기 시작했다. “후손이 수원세무서 옆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일본의 한줄 자료를 근거로 수원을 90여 차례 방문하며 후손을 찾아 헤맸다. 6년여 만에 송홍록-송만갑의 동편제 후손인 송기화씨를 찾아냈다. 자신이 명창의 후손인지도 몰랐던 그가 내민 족보에는 동편제의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운봉 국악의 성지에 동편제 시조의 묘를 만들 수 있었다. “조사를 하면서 판소리가 절대 안 없어진 이유를 하나 발견했어요. 우월한 유전자예요. 서로 다른 제의 집안끼리 결혼을 하면서 소리 유전자가 이어졌던 거예요. 족보를 보면 누가 최고의 명창이 될 수 있을지 알아 낼 수 있다니까요. 지금도 이런 자료는 찾고 있고 아마 평생을 찾아야 할 거예요.”

이렇게 한번 목표를 정하면 해답을 얻을 때까지 미친 듯 돌아다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넓은 풀밭에 바늘이 떨어져도 찾아올 사람’이라고 한다. 신기할 만큼 하나의 단서에서 ‘사실’을 찾아내는 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에 주변사람들의 평이다. “아직 공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들도 있고……. 국가가 언젠가는 판소리 관련 자료를 정리해야 하겠죠. 국가가 이 자료를 필요로 할 날이 온다면 그때나 공개할 수 있을 겁니다.”


옛사람들의 감성적 시스템에 주목하다

판소리에 대한 조사는 또 다른 새끼를 쳤다. 소리꾼들이 무엇을 잘 먹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소리꾼들이 잔병치레도 적고 장수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이유가 궁금한 그는 10여 년 전 연구소 이름을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지리산 인근의 문화와 생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돈도 없고, 전국을 떠돌아야 했던 소리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6년 정도 더 건강하게 살았던 것은 최고의 자연식을 먹었던 때문이었다. 그렇게 잊혔던 우리음식의 이야기들을 하나둘 밝혀냈다.

“소리꾼들의 음식을 조사하다 알아낸 사실인데, 청국장에 넣는 볏짚을 위한 청국장 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청국장을 발효시키기 위해서는 콩과 볏짚에 있는 바실러스 서브틸리스균이 필요해요. 옛 사람들은 이 균이 착해야 맛있는 청국장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청국장에 들어갈 볏짚도 착한 사람이 지여야 하죠. 일 년 동안 가장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뽑아서 청국장 논을 짓게 했다고 해요.” 

우리 삶에는 이처럼 감성적 시스템이 있었다. ‘청국장은 최고의 재료’라고 하는 것은 서양의 방식이지 우리나라의 감성적 방식은 아니라고 했다. 소리꾼들은 이런 감성적 생활방식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감성적 시스템은 집짓기, 맛의 비밀, 지리산 약초와 최근에 조사 중인 추어탕 맛의 비밀로 그에게 이어졌다. 숱하게 잊혀진 조상의 지혜가 그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우리가 한국에 살지만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에요. 다 짝퉁 한국인이죠. 철따라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 최고인 것을 옛 사람들은 알고 있었어요. 감성적으로 비우고 사는 철학이 있었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조사를 통해 배우게 됐죠.”


백두대간에 스며든 문화를 기록하다

지리산문화를 연구하면서 그는 ‘문화대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백두대간이 우리의 몸이라면 문화대간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몸과 정신이 합해져 하나의 개체성을 띠는데 우리는 백두대간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은 일본적 사관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정신이 강한데 일본이 정신과 몸을 분리했던 거죠. 하지만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민족의 정기와 산줄기만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도 이어졌어요. 산줄기나 삶터에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것이 문화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조선시대 두익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조선시대는 씨족개념이 강해 타 지역과 경쟁하고 경계하는 것이 심했다. 그래서 두 지역사이에 완충지로 두익지를 두었다. 이 두익지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가 교류하고 섞이게 되는데, 조선팔도에 신경조직처럼 뻗어 있었다. 이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문화대간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백두대간과 문화대간이 합해져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백두대간 순례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은 보지 못하고 가죠. 그 안에 들어 있는 문화를 알고 봐야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일 텐데 말이죠.” 

이런 개념에서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의 개념을 넘어 북방계와 남방계 문화유전자가 충돌하여 융합된, 문화대간의 중심지로써 중요한 산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화대간의 중심 지리산에 관한 문화자원을 기록하는 것은 그의 사명과 다름없다. 황산대첩 승전무기, 이성계 장군의 꿈의 길 스토리텔링, 동편제로 지리산을 말하다, 남원 고지도가 품은 오래된 남원 이야기 여행 등 14권의 책에는 그의 그런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료들이 쌓이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공무원,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말고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요원, 국가기록원 민간기록원, 무형유산원 무형유산지기라는 직함이 있다. 강의요청도 쇄도하고 지리산 오지탐험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부분 봉사직이지만, 지리산 문화자원을 조사하면서 얻게 된 것들이라 의미가 있죠. 하지만 저는 원자료를 찾는 사람이에요. 언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필요할 겁니다. 한국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지금, 가장 원형적 자원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찾기 시작했잖아요. 아직도 8개 과제가 남았어요. 그건 비밀이에요.”

그는 열심히 기록하는 하고 있지만 하나둘 사라지는 것들에 아쉬움은 크기만 하다. 그에게 판소리에 대해 들려주던 노인들은 세상을 떴고, 그에게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준 연곡사 옆 할머니 집도 사라졌다. “자기와 어울려 사는 것이 30가지 이상이면 부자고 8개 이하면 가난하다고 하셨어요. 모기 파리, 시냇물, 뽕나무……. 할머니는 최고의 친환경 조건을 구비한 속에서 사는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지금 똑같은 걸 추구하는 것이잖아요. 옛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이미 가지고 있었어요.”

‘수입의 3분의 1은 자기 것이 아니다’는 아버지의 철학으로 그는 사비를 털어 구전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돈을 내놓았지만 배우고 얻는 것이 많은 그는 할머니가 말한 부자일 테다. 기록라고 전수해야 할 것들, 우리가 배워야 할 옛사람들의 지혜를 미래로 이어주는 그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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