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시사의 창]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오늘의 농업 위기
양병우 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강사(2003-09-15 14:41:47)
근대사 이래 농업, 농민 그리고 농촌문제에 대해 요즈음처럼 우리 모두가 함께 흥분하고 관심을 쏟아 본 경험은 일찍이 없었던 상 싶다. 남미 우루과이 원탁책상(Urgugay Round:Round)의 본디 뜻은 원탁 책상인데 통상용어로는 다자간 무역협상이라는 의미를 갖음)은 과연 괴물의 위력을 지녔나 보다, 그러기에 동방의 한구석 한민족 모두의 이마를 그렇게 시퍼렇게 피멍이 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원탁책상의 괴물에게 얻어맞기 전에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농업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강구했다면 좋았을걸.
이미 10여년 아니 훨씬 더 이전에 벌써 우리 농민, 농촌의 모습은 현재 우리 노부모님들의 생활상이었다. 자갈논 팔아 자식들을 대도시로 보내 교육시키고 유학까지 보낸 탓에 우렁이 껍질만 남아 경제적 곤궁 속에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노부모님들 모습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추석, 설날 명절 때에 귀향하여 노부모님께 겨우 떡값 정도의 용돈 드리는 것으로 큰 도리라도 다한 듯이 치부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의 농업정책도 이와 같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농업정책을 회고해 볼 때, 마치 자식을 위해 평생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도 며느리 눈에는 그 노부모님이 천덕꾸러기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듯 우리 농업문제도 거시적인 국민경제 발전을 제약하는 비효율적이고 생산성이 낮은 천덕꾸러기 산업으로밖에 취급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수출에 기반을 두 공업화 우선의 불균형 성장정책을 시발로 하여 오늘의 UR타결에 이르는 동안 '희생하여라! 희생하여라!'라고 부르짖으며 농업을 경시해온 과정을 보면, 지금의 「농업 위기」는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농업을 이렇게 위기에 이르도록 내팽겨 친 과거의 성장정책을 깊이 재고해야 할 때늦은 시기에 마음만 바쁜 상황이다. 그러나 과거 농업경시 성장정책의 반성은 곧 UR타결과 이의 대처방안을 따져보고 또한 농업위기를 극복하는 선결조건이다.
괴물 우루과이 원탁책상은 다름 아닌 경제강대국들이 만성적 경기침체를 무역구조의 개선을 통해 회복하려는 방안과 한국이 추구해온 경제성장정책과의 대립과정에서 탄생한 산물에 불과하다. 미국은 만성적 재정 및 국제수지 적자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산물을 포함한 모든 산업시장의 세계무역질서를 UR을 통해 자유주의적으로 개편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강대국으로서 정치, 외교적 힘을 구사하였다. EC제국은 공동농업정책(CAP)의 일환인 농산물 수출보조금을 철폐하라는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일본 및 신흥공업국으로부터는 농산물 수입개방조건을 얻는데는 미국과 보조를 같이 했다. 여기에 일본은 지속적인 무역수지 흑자 속에서 농산물수입국인 관계로 미국과 EC로부터의 농산물 수입개방 압력의 파고는 어차피 맞아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파고를 신흥공업국인 한국과 대만 등에 전가하여 자국시장 보호의 방어벽으로 이들 국가를 이용함으로써 무역협상의 반사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무역전쟁 와중에서 지속적 경제성장은 곧 수출주도형 공업정책의 강화임을 맹신하면서 공산품의 수출가격경쟁력을 제고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국제경쟁력 제고의 기본적 수단은 농산물 수입개방 정책을 희생양으로 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하고 동시에 국내 공산품 수출시장을 확대하는데 있어서 세계 자유무역 질서의 유리성을 십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농업이 UR타결과 함께 시장개방화로 인해 당면하게 된 위기는 국제적인 요인과 국내적인 요인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장개방의 피해를 극소화하는 이 같은 대내외적인 요인들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단하고 처방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처방노력은 정책당국, 기업 그리고 농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대외적인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는 대처방안은 우리에게 농산물 수출대상국이 될 수 있는 선진농업국가들의 농업생산구조 및 농산물 교역조건에 대하여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동시에 세계 5대 곡물메이저와 거대 애그리비지니스트(Agri-businessist)들의 국제 농산물시장 지배력에 의한 영향도와 그 파급에 의한 국제 농산물가격 파동에 대비할 수 있는 안정적 공급정책을 마련해야겠다. 또한 경제대국들의 세계농산물시장 자유화전략의 피해를 경감하기 위해서는 우리경제의 대외무역 의존도를 다각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그동안 심화되어 왔던 대외무역의 미·일 의존도의 정도를 경감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수입 농산물에 대한 통관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할 수 있도록 세부조항을 만들고 관련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에게 무공해 식품의 공급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접적인 수입규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잇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내적인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UR타결이후 농업부문의 대처방안은 국민 모두가 이제라도 농업회생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농업은 아직도 하나의 산업으로서 충분한 「효율성」을 발위해 국민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공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한국농업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시장경제나 교역가치만이 아니라 민족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생태·환경보존을 담당하는 공익적이고 역사적 기능으로서의 비경제적 가치까지도 포함하므로 경제논리 이전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에 반하여 국민 경제 내에서 농업의 상대적 생산성이 저하하고 있는 비효율성 산업으로서 국제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농업은 과감히 축소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의 공통성은 한국농업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부여에 미약함을 보이고 있다. 물론 첫 번째 주장의 의미는 앞으로 농업발전의 방향이 농업의 시장 경제적 가치생산 기능뿐만 아니라 공익적 기능도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주장은 성장정책을 주도했던 경제정책 입안자들의 편견이었던 것이 오늘의 UR타결과정과 그 결과에서 증명되고 있다. 멀지 않은 고거 선진국의 반복되는 역사의 교훈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산업혁명이후 인구 폭발과 농업경시 정책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까지 세계최대의 곡물수입국으로 전락하여 국가위기를 맞았던 영국은 지난 40여년 동안의 농업회생 노력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였다. 현재의 영국은 오히려 곡물수출국으로 부상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때는 세계최대 곡물수출국이었던 러시아가 현재에는 이미 선진농업국임에도 불구하고 체제붕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의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긴 했지만, 그 중요한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농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다.
농업생산의 「효율성」은 상대적으로 저하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저하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농업생산은 기술변화, 생산체계의 개선 그리고 농업구조개선 등을 통해 분명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산업간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책의지가 필수적이다. 산업부문간 투자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정부의 주도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경제의 재정투용자 재원 마련 여건이 경제발전과 함께 충분히 성숙되어 있는 단계이다.
농업투자를 우선적으로 선정하는 정책의지는 농업이라는 산업의 투자「효율성」이 그 척도가 될 수 없고 「형평성」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 공산품 수출을 위한 국제 경쟁력제고는 어느 계층에게 그 효과가 배분되는가 반성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농업회생을 위해 「국민적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경계해야할 것은 농업이 한 산업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효율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로 농업이라는 산업을 상대적「효율성」의 척도로 가늠하여 「형평성」을 잃고 있는 재래방식의 경제성장정책을 입안하고 신봉하는 일부 정책입안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농업문제를 토의하는 TV방송대담에 초대된 정부의 어느 정책입안자는 국민의 여론이 농업부문의 재정부담을 더 이상 원치 않기 때문에 추수곡매가를 인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난 얼마 후 추수곡매가 인상에 대한 전화응답 여론조사 결과는 70%정도가 인상에 동의한다는 발표였다. 이 사례는 이미 농업, 농민, 그리도 농촌을 위한 「국민적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감대를 파괴하는 일부 경제정책 입안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개방화시대의 농업위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증표이다.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농민단체 및 농업 관련 종사자들이 농업 회생의 가능성과 농업에 대한 우선적 투자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정책배려를 요구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농업의 주체인 농민의 정치적 역량의 배양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농민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농사의 즉흥적인 대응방법으로는 얽혀진 실타래를 풀 수 없고 넓고 깊은 안목에서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해야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무엇보다도 농업 구조조정사업과 경쟁력 강화대책은 농업의 주체인 농민의 참여와 그들의 의견과 대안을 충분히 반영하여 장기적인 종합정책을 이행함으로써 농업회생의 길이 마련되는 첩경이라고 본다.
농정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이 일소되고 「국민적 인식의 공감대」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농업구조개선 대책은 유지된다면 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농업구조개선 대책은 언제든 다각적인 방법으로 이에 대한 지혜가 모아질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농업위기의 출현은 대책이나 연구부족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고 정책 입안자들의 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농업위기의 극복을 위한 노력은 자식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우리 노부모님들의 복지문제 해결과 직결된다는 「인식」을 우리 함께 공감하자.
양병우 / 57년 남원 출생으로 전북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93년 덴마크 왕립대학 자원 및 경제학과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