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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 | 칼럼·시평 [문화칼럼]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
이향준(2014-10-08 15:43:49)

분위기나 규모가 남다른 볼거리를 뜻하는 스펙타클이란 낱말은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 이후 어떤 심오함을 획득했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라고 할 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책이 처음 나타난 것이 1967년그 유명한 68년의 직전 해이다이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스펙타클이 무엇이냐는 질문 자체가 이 책의 연륜만큼이나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이 주장의 현재적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의 침몰, 영화 명량의 흥행, 교황의 방한이라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낳은 이미지들이 있다. 이미지들은 자신들의 출현과 함께 인접한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련의 서사를 형성한다. 현실은 침몰하지만, 신화가 된 역사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바깥에서는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는 따듯한 보살핌이 도착하는 것이다.  


스펙타클은 이러한 서사의 창조에 결정적이다. 그것은 결코 액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린 지폐가 아니다. 차라리 숫자를 기입하지 않은 백지수표에 가깝다. 누가 얼마를 써넣을 것인지가 결정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들로 짜여질 서사는 어느 정도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문제는 수표가 허공에서 발행되지 않듯이 이미지들도 무에서 나타나 진공의 공허 속을 흘러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때 어떤 대중 가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노래했다. 사실 개인적 삶의 전체 영역을 스펙타클이란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은 불교적 상상력이었다. 명부를 관장한다는 시왕(什王) 가운데 다섯 번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이다. 그가 사용한다는 광명경(光明鏡)은 죽은 사람의 일대기를 주마등처럼 비춰준다고 한다. 인생의 숨겨진 사건들은 속속들이 드러나고야 만다. 


여기에서 드보르의 용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이 업경대(業鏡臺)에 비춰보는 대상을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 확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상이한 스펙타클에 사로잡혀 있는 만화경의 현장이다. 세월호의 잔상 위로 명량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중첩되고, 그 옆에서는 방금 도착한 교황을 향한 마중과 환대가 한창이다.  


이런 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오직 이미지의 소비가 두드러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미지들의 배후에 놓인 사회적 관계들의 구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구조 변경을 시도하려는 노력은 예외 없이 이미지의 바깥으로 불려가 행방불명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추레한 복장과 투박한 색조가 입혀진 철지난 마네킹처럼 한 때는 익숙했으나 지금은 관심이 식어버린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그렇게 비워진 여백과 불 꺼진 재와 같은 관심을 염려하듯이 세월호의 이미지를 치워버린 브라운관 위로 또 다른 스펙타클의 향연이 펼쳐진다. 구천을 떠돈다는 영혼들의 방랑은 사실은 내몰린 이미지들의 비명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이 상상력에 기초한 창작이라는 상투적 진술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인어공주는 환영받지만, 마그리트의 그것은 반대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환대는 꿈꿀 수도 없을뿐더러 결코 단 한 번도 인어공주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어떤 스펙타클은 우리의 환상과 열광을 부추기지만 다른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며, 그것의 등장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안겨줄 뿐이다. 도대체 어떤 상상력이 예술의 원천으로 불려야 하는 것인가. 


마그리트의 인어는 인어공주가 스펙타클이 가져다주는 환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것이 해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애초의 스펙타클이 그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 생산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스펙타클의 양상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것의 환상성이 허구라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환상적인 스펙타클이란 사실은 우리를 오도하고, 속이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명량이 보여주는 믿을 수 없는 승리는 우리에게 인어공주의 환타지를 선물한다. 그것이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 환타지의 성격을 실체에 가까운 것으로 격상시킨다. 하지만, 세월호의 침몰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 1천500만을 넘어서는 관중을 동원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면 이 환타지의 성격이 매우 예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한쪽에 대해 눈을 감음으로써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 열광할 수 없는 침몰을 배제함으로써만이, 열광할 준비가 돼 있는 침몰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 수적 열세를 딛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수 애국자들의 분전 속에서 침략자들의 군선에 가해지는 최후의 일격이 야기하는 이러한 침몰이야말로 그 정의에 어울리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인어는 끊임없이 이 스펙타클의 재구성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전도된 이미지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침몰이 침략군의 전함에 투사돼 시각화되고, 우리가 겪는 좌절이 함성과 찬탄으로 뒤바뀌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은 별로 새롭지도 않다. 교황의 방한에서 생산된 시각적 이미지의 메시지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세월호의 침몰이 명량의 침몰에 대한 열광을 강화하는 것처럼, 동일한 것이 교황의 위로를 더욱 환상적으로 만든다. 침몰의 원인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은 이 거대한 스펙타클의 전장 앞에서 구겨진 채로 밀려난다. 늘 그렇듯이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스크린에 걸릴 때, 마그리트의 인어는 잡지의 믿거나 말거나 코너에서 배경 이미지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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