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술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운동가, 활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그렇게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 ‘문화공간 싹’ 채성태 대표(41)는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또는 ‘사람의 삶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는 오히려 그가 미술가이며 동시에 사회운동가라는 심증을 굳혀준다. 전주 서신동을 ‘서식처’로 삼고, 전국을 활동무대로 지역과 주민 그리고 문화예술이 잘 뒤범벅된 마을 공동체 만들기를 도모하는 그를 만났다.
행복한 사람들로 채워진 화폭 밖 세상을 꿈꾸다
그의 전공은 한국화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화폭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캔버스의 작은 화면이 아닌, 이 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가로써 그의 꿈이기도 했다. “서로 손 잡으면 더 나아질 수 있는데, 몰라서 못하는 거다, 서로 손잡게 할 방법이 무얼까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고민들을 평면으로 표현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화폭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행복을 알아가는 모습들로 채워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한국 사람을 만나서 그리는 그림이니 한국화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화폭을 벗어난 그의 그림 그리기는 한국화를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시작됐다. 처음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노송동 코아백화점과 중앙시장이었다. 지금은 덕진동 연화마을을 거쳐 지금 ‘문화공간 싹’이 자리하고 있는 서신동으로 활동영역이 바꿨다.
그가 서신동에 눈을 돌린 97년은 개발의 여파가 심했던 때였다.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동네와 자연부락 사이의 빈부격차가 심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심했던 곳이 바구멀, 재뜸, 감나무골 등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이 마을들은 언제일지 모를 재개발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마을의 분위기는 거칠어졌고, 오랜 기다림에 젊은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소외받는 아이들과 함께 예술교육을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다니던 지역에서 아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들의 동선과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길가의 돌멩이도 수업의 주제가 됐다. 돌멩이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은 어떻게 변했는지, 내가 사는 동네는 어떻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낸 수업의 주제들을 모은 것이 그가 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가 하는 교육프로그램을 그는 교육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그 땅의 주인이라고 느껴야 해요. 거기서 자긍심을 느끼고, 자신이 사는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죠. 하지만 그건 꼭 교육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에요. 아이들이면 어른들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지혜를 배우게 하는 거죠.”
지역을 알아갈수록 하나둘 살펴야할 것들이 늘어났다. 아이들 돌봄에서 시작한 일은 노인 복지문제로 이어졌고, 청소년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생기면서 나이별 교육 프로그램도 생각해야 했다. 2005년 ‘문화공간 싹’을 만든 것도 늘어나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생기면서 이 지역 안에서 알아야할 것들과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과는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10년이 넘게 아이들과 함께했으면서도 여전히 그가 ‘이방인’이었던 것은 예술가인 자신의 입장만을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2009년에야 깨달았다.
나눔의 문화 지역에 뿌리내리다
이방인일 때는 그들의 비위를 맞춰줬지만, 주민인 그는 싫은 것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주고, 그의 존재를 인식시켜주는 것이 오히려 이방인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었다. 그제야 주민들이 그를 주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사소한 것에 삐지기도 하고, 싸움도 많이 해요. 그렇지만 주민으로써 삶을 사는 시간이 늘면서 주민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사과를 드리고 감을 받았고, 사소한 일상이 나눔의 공동체를 만들었죠. 지역의 변화를 만든 지역의 생활문화공동체였죠.”
2010년 ‘문화공간 싹’이 이사를 할 때, 그는 나눔과 감사의 마음이 서로 통했음을 확실히 알았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지하에 공간을 지켜야겠다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나둘 주민들이 모였다. 아이들은 빗자루를 들었고, 목수는 망치를 들었고, 어르신들은 페인트를 칠했다. 사소한 일상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자발적 참여의 기회를 만들었음을, 지역이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봤다.
확장 이전한 ‘문화공간 싹’에서 그는 모든 지원을 포기하고 지역민과 나누는 구조를 만들었다. 부족하면 돕고 많으면 나누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주민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때부터 ‘문화공간 싹’은 지역 나눔 문화 정착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주민이 운영하는 나눔 활동, 학생들과 함께 하는 나눔 봉사활동, 초등학교 및 지역사회와의 협력 나눔이 주요 활동이에요.”
‘부모가 앞장서는 교육-엄마, 아빠가 떴다!’는 맞벌이 부모가 많은 지역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을 부모가 기획하고 부모가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주민이 운영하는 나눔활동이다. “처음에는 광고를 했어요. 아버지를 찾습니다. 어머니를 찾습니다, 이렇게 방을 붙였죠. 누구 할머니 집나갔냐, 무슨 일 있냐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어요. 애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어른들이 신경 써야지 않겠어요, 아는 것 있으면 어른으로써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세요하며 주민들을 모았죠.”
간호사였던 엄마는 응급처치교육을, 장사를 하는 엄마는 경제교육을 담당했다. 꽃꽂이, 서예, 한자에서부터 공구 쓰기, 바느질하기, 단추달기, 야채 고르기 등 일상에서 아이들이 경험해야 할 것들에 대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됐다. 어느 순간 아이들도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주고, 중고생이 초등생을 가르치며 나눔 교육을 스스로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 동아리에서 지역사회를 바라보다
나눔의 정신은 아동, 청소년, 주민들의 자생적 동아리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동아리는 ‘벽화 그리는 아이들’이다. 그가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초등학생들이 돕기를 청하더니 어느새 동네에서 해야 할 일들을 찾는 아이들이 됐고, 동아리를 만든 것이다. 초등생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고등학생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어린 동생들을 보며 부끄러웠는지 ‘헤르메스’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생들에게 지역의 역사나 생활사를 가르쳐주기 위해 노래를 만들더니 지역축제를 만들고 사회현상에 눈뜨고 지역사회문화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아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주변 친구들이 삶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살을 시도했던 아이, 부모들의 상황이 어려운 아이들이 자신만의 사연을 안고 동아리로 모였다. 관심분야와 연령으로 나뉘어 동아리가 동아리를 만들며 10개가 넘은 동아리가 운영됐다. “점심시간이면 10개가 넘는 동아리 아이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바빴어요. 자신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구조 속에서 발견하게 하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치료하도록 하는 거죠.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주변의 현실을 보여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던져주는 식이죠. 그러면 아이들이 일을 저지르기 시작해요. 잠시의 단초만 알려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알아가더라고요.”
재개발로 인해 나뉘고 찢긴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도 함께 진행됐다. 사소한 행사들을 꾸준히 열어 주민과 만났다. “재개발이 언제 될지 모르는데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 없이 살아도 없는 대로 즐긴 건 즐기자고 했어요. 때때마다 축제도 열고 일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일들을 사람들과 즐길 수 있는 행사로 만들어 갔죠.” 사소한 것들이 행사가 되는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지난해 재개발이 재개된다는 소식으로 동네에 난리가 났을 때 아이들은 불안에 떠는 어른들을 위해 이불빨래를 해주자며 빨래 축제를 열었던 것도 그는 기억이 선명하다. 마을 생일잔치, 고기파티를 하며 다양한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시간도 가진다. 그는 지역사회 안에 있는 무료시설과 기관에 대한 교육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꼼꼼히 한다.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자는 생각에서다. 함께 즐기고 함께 배우며 공동체는 더욱 탄탄해졌다.
절실한 누군가에게 내미는 손이 되고 싶다
끝도 없이 마을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 많은 일들이, 얽히고설켜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될 정도로 복잡한 그의 연대기다. 이 어려운 일들을 하며 그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제가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저 같은 아이들을 만들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어려운 환경에 방치된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계속 꿈꿀 수 있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거동을 못하는 부모님이 있어 그가 집안을 꾸려나가야 할 정도로 그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도 하고, 고등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도 그는 그가 처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몰래 그림을 배우며 화가로써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면 좀 더 쉽게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바랐던 절실한 도움을 이제는 그가 주고 싶었다.
목욕탕 때밀이, 구두닦이를 하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북대 미술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진학했지만 스스로 학비를 벌고 생활을 하기 위해 하는 일들은 변하지 않았다. 맞고, 돈을 빼앗기며 일을 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나아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지역에서 활동을 하며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공사장, 목욕탕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죽림온천에서 때밀이로 일을 하다 교수님께 들켜서 혼도 많이 났다. 그러나 어쩌랴, 돈 들어갈 데는 많고 몸은 하나이니 바쁜 일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마구잡이식 일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사람을 얻었다. 아니,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소통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얻어졌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먼저 사람을 인정해 주는 거다. “이런 걸 하데요, 참 솜씨가 좋아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하며 친해지고, 배운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같은 관심사를 중심으로 소통이 시작된다. “이런 과정에서 원리를 발견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내 이야기 안 들어준다’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소통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더군요. 소통이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목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한 거죠. 이렇게 사람을 사귀다 보니 관계가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남은 어두웠지만 진심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본 모습을 알아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 때 그를 무던히도 괴롭히던 사람들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그를 때리던 사람도, 그와 막노동을 했던 사람도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돈으로 또는 노동력으로 그의 일을 함께 돕는다. 이해와 소통. 그가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이제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됐다. 그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간 후, 장가기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그를 챙기는 주민들도 부쩍 늘었다. 차 태워다 주고, 밥 챙겨 먹이고, 지하셋방에서 집도 옮겨준 것도 마을 주민들이다. 좋은 일 더하라고 회사나 개인으로부터 물품이 오는 경우도 많아졌고, 다 큰 아이들이 생일선물을 들고 그를 찾아온다.
매해 이곳을 떠나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가 막상 떠날 마음을 굳히면 그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러다 시기를 놓치고 올해만, 내년만을 다짐했던 것이 17년이다. 이제는 이 중요한 일을 놓고 가야되나,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우는데 욕심 부릴 것이 아니구나, 생각한다.
“계획이요? 그런 거 없어요, 세우지도 않고요. 궁금하면 참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거든요. 살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문제가 되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을 통해 가야할 길이 조금씩 만들어지더라고요. 하지만 제 몫은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하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일,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