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4.2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남성작가의 페미니즘 소설
여성문학연구모임(2003-09-15 14:43:47)
남성작가들이 페미니즘 소설을 썼다! 우선은 반갑고 고맙다. 여성문제가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들과 공유하고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임을 증거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한 후에 내놓은 흔적이 여성문제의 복잡하고 요원한 길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그 동료들이 바로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일터와 사람)의 이인휘와 「남자의 가정」(풀빛)을 쓴 정인택이다. 이 두 사람의 작품∼많이 다르면서도 그만큼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을 한 데 묶어 이야기하는 데에는 상당히 의도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남성작가들이 거의 최초로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을 내놓았다는 외적인 사실에 두는 일차적 의미에서이고, 또 하나는 첫 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남성의 눈으로 보는 여성문제랄 얼마만큼의 의의와 한계를 내포하는가 하는 내적이며 분석적인 시각의 요구에서이다.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여성문제를 사회구조적 모순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작가들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출발한 만큼이 작품들에서 여성억압의 본질을 추려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는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사회구조적 모순, 혹은 그 양자의 결합이다. 그렇다면 90년대를 살아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 모순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체화해내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지향이 얼마만큼 여성해방에 가까이 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두 작품의 성취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세 여성인물은 작가의 지적대로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들의 전형을 각각 나누어 업고 있다. 주인공 남자(선우)의 아내인 정인과 그녀의 여동생 정윤은 각기 '곡식의 여신이자 모성애를 상징하는 데미테르'와 '지혜와 수공의 여신으로 남성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아테나'의 화신으로 여성학 강사이자 성문제 상담소의 상담원인 우경희는 '사냥과 달의 여신으로서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적 정신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작가가 왜 굳이 신화에서 여성인물의 전형을 빌어왔는지에 대한 의문을 일단 접어둔다 하더라고 그 여성들을 '현실세계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이 소설에서 맨 처음 드러나는 문제는 선우와 정인 사이의 성적 갈등이다. 자신의 뜻에 반한 공격적인 성행위에 대해 정인이 느끼는 감정은 낯선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듯한 모욕감뿐이다. 반면 남편은 '병적으로' 성을 기피하는 아내로부터 의식적으로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인의 부자연스러운 성관은 어린 시절 새어머니와 일꾼 삼봉이 아저씨의 불륜을 목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성 그 자체를 동물적인 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은 '남편의 만족으로 족하다'는 데미테르적 심리에 머물러 있다. 이들 부부는 서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의 타결책도 모색하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다. 파경의 원인은 훨씬 복합적이어서 돈만 아는 속물적인 장인과의 갈등과 선우의 직업적 자괴감('관제언론의 똥개')에서 비롯된 개인적 패배의식과 우경희와의 만남 등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내와 우경희를 비교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술에 비중이 두어져 있다. 이런 혐의는 작가가 여성 인물들을 묘사할 때 드러내는 지나치게 성적인 시각에서 보다 두터워진다. 이점은 전체적으로 작품을 통속적으로 만들 소지가 많으며 그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부간의 성적 갈등이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가 된다. 그런가 하면 정윤의 문제는 비교적 선명하게 그러나는 셈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과도한 남성지향성 그것이다. 스스로 여성이기를 거부하는 그녀는 남성적 속성을, 혹은 그것만을 모두 갖추고 있는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이지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우리 사회의 벽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화에서의 아테나는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가부장제의 옹호자라는 사실이다. 이 모순을 작가는 아들 하나 더 얻으려는 욕심에 어머니를 내쫓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능력 있는 여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심한 나라'라는 현실 속에는 용해시켜보려 하지만 신화와 현실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왜냐하면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정인과 정윤이 정반대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작가는 현실적인 원인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다'는 식의 생래적인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에 의존할 뿐이다. 신화보다는 오히려 프로이드에 가까운 이런 여성관은 사회의 구조적 억압을 밝히겠다는 작가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또 한가지, 정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반드시 응징하고야 마는 파괴적, 공격적 여성으로 그려진 것도 지나치게 신화적 전형에 집착한 결과로 읽히는데, 용역회사에 의뢰하여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테러를 하게 한다든가 마지막에 엽총을 들고 복수하러 가는 장면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무협소설을 방불케 한다. 게다가 그녀가 응징하고자 하는 대상이 언제나 남성 개인이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그동안의 응징을 가능케 한 용역회사 백기호의 배반이라는 사실은 여성문제의 구조적 모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대남성 투쟁의 일면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우경희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의 두 여성과 비교할 때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진 이 인물은 작가가 대안적 여성상을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작가가 참고했으리라 짐작되는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진 시노다 불린 지음, 또 하나의 문화 펴냄)을 보면 아르테미스는 여성운동을 이상형으로 생각해 온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한다. 경쟁력과 성취력, 남성들과 그들의 의견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 그리고 고통 받는 자들과 힘없는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는 것인데 우경희란 인물이 과연 그에 값하는 여성인가? 그녀의 생활은 우리 사회의 여성운동가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시간강사가 작은 아파트와 작은 승용차를 유지하며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심 많고 부유한 부모의 지원이라 이해하고 넘어가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선우와 사랑에 빠진 그녀의 '정말로 불륜과 간통은 모두 죄악인가'라는 항변은 성문제 상담소에서 불행한 여성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여성운동가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렵다. 신화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리얼리티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선우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아내와 딸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는 있지만 우경희라는 여성에 대해 지니는 애정도 손상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녀는 세 가지 유형 중 가장 바람직한 여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가정』을 보자. 작가 정인택은 "이 시대에 건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든 남성들 역시 이 시대 상황의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썼다....남성들로 하여금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것과 아울러 주변과, 특히 가정 안에서 대화할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는 말로 자신의 작품을 규정하고 있다. 접근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작가에게 포착된 여성문제의 본질 역시 가부장제의 잔재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다. 촉망받는 유능한 회사원 박상우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아내와 역할 바꾸기를 제안한다는 다소 이례적인 사건이 소설의 출발이자 중심 모티브다. 역시 유능한 회사원이었지만 아이를 원하는 남편의 뜻에 밀려 퇴직한 전업주부가 되어 있는 희은의 상황이 역할 바꾸기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즉 한 가정의 경제 전담자여야 하는 남편의 역할과 현실적 여건 때문에 집안에 묶여야 하는 아내의 역할을 맞바꿈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이렇듯 단순명료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부부의 갈등도 쉬이 풀리지 않는다. 사실 상우가 회사를 그만둔 데에는 위기에 처한 가정을 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도 부패한 사회생활에의 염증이 가져다준 도피 심리가 깔려 있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 강하게 보인다. 가정의 위기 또한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데, 상우가 '대화 없음'이라고 단정짓는 것과는 달리 희은에게는 남편의 의도에 대한 의심(확신에 가까운)이 더 크게 작용한 듯 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한 한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아마 작가가 사실 여부보다는 그러한 문제들을 둘러싼 대화의 결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여곡절 끝에 역할 바꾸기에 성공한 그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를 아주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이 점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에서 맛볼 수 없는 사실적 재미와 진지함이다. 해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상우가 딸 누리를 키우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아내를 돈벌러 내보내고 집에서 애보고 살림하는 이상한 남자에게 던져지는 사회적 편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회의에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회사에 다시 나가기로 결정하는 결말은 잘못된 선택의 바로잡음일 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려고 끈질긴 싸움을 벌이던 희은이 일단 아이의 엄마가 되자 거꾸로 아이에게만 집착하는 태도는 어진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억지로 집안에 들여앉힌 남편에 대한 원망이라면 역설적이지만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내게 남은 재주가 아이를 낳는 일이야. 당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뺏어 가는데 선수야"라는 희은의 진술과 '그녀는 출산과 육아의 숙명을 자신의 포기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를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라는 상우의 진술은 남성작가가 지닌 여성문제 인식의 한계를 노출시킨다. 희은의 진술도 억지스럽거니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은 놀랍기조차 하다. 작가의 이런 시각은 결말의 '끌어안기'라는 소박한 해결로 이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소설을 맥빠진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생생한 인물이라는 창작의 힘이 여성문제 천착의 미흡함을 전부 가려줄 수는 없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이에 반해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진지한 모색에도 불구하고 인물 형상화에 있어 작가가 드러내는 기계적, 관념적 사고 때문에 올바른 대안으로 나아가지 못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덧붙이자면 여성문제의 복합성과 해결 전망의 지난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씁쓸함이기도 하다. 여성문학 연구모임 / 93년 3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문학 드라마 영화 등 문학에 나타난 여성문제를 비판하고 개선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단체로 여성이론, 문학이론 등을 토론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