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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2 | [문화저널]
판소리명창 "북은 사람의 혈맥이나 마찬가지" 명고수 이정업 3
최동현 군산대 교수, 판소리 연구가(2003-09-15 14:47:32)
이제 이정업의 북가락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이정업의 북가락의 특징에 대하여, 그 가락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정업의 북가락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리하기에 편하다는 것이며 둘째, 추임새가 독특하며 훌륭하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의 평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에 와서 보면 고수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스타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수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과,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리꾼을 충실하게 도와서 소리 자체를 빛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고수가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은 최근에 와서 북가락이 세련을 더해가면서, 고수가 독자적인 자신의 예술 세계를 개척함에 따라 생긴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전라도 북부 지역의 이른바 한량광대가 많은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고수가 자신을 될 수 잇는 한 감추고 소리꾼을 충실하게 보필하는데 만족하는 이른바 ‘보비위 북’은 보다 더 고전적인 북가락에서 나타나며, 직업적인 고수들의 경향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경향은 판소리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곧 판소리가 소리 중심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소리와 북의 조화에서 판소리의 참다운 예술성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전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보다 더 오래된 판소리사의 초기에는 소리 중심의 판소리관이 우세했던 듯하며, 현대에 오면서 고수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정업의 경우 철저하게 소리 중심의 북을 친 것으로 생각된다. 소리꾼들이 한결같이 소리하기에 편하다고 그의 북가락을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이정업은 될 수 있는 한 소리꾼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다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을 보비위 북이라고 한다. 보비위란 소리꾼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서 소리꾼을 도와주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보비위를 잘하면, 소리꾼은 소리하기에 편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보비위 북이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소리꾼을 빛나게 해주기란 보통의 노력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북가락의 솜씨가 소리꾼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능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맡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소리꾼을 도와주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고수의 인격과 관련해서 그가 참으로 희생적이 아니면 안 된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씨가 없다면 보비위란 어려운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가락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정업의 언급은 시사적이다. 북은 사람의 혈맥이나 마찬가지죠. 제대로 박자가 들어맞아야 소리도 마음놓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옵니다. 혈맥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출처 미상의 1972년 일자 미상의 신문기사) 이정업은 북에 대해 말하면서 항상 소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북가락의 적극적인 역할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감추고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기능을 다하려는 의지, 바로 그것이 이정업의 북가락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소리를 잘 되게 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명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실패한 판소리를 통해서는 결코 명고수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소리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관련하여 또 하나 들 수 있는 이정업 북가락의 장점은 정확한 한배이다. 한배란 거칠게 말하면 일정한 빠르기를 말한다. 판소리는 시간 예술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 위에서만 지각이 가능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술로서 현상된다. 그러기 때문에 음악적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고수의 북가락이 일정한 빠르기, 곧 일정한 흐름의 속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소리꾼은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일정한 빠르기란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기계적인 정확성을 벗어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는 것, 그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되었을 때 소리꾼은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마음놓고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업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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