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꾸고 산다. 그 꿈은 소박한 꿈일 수도 있고 아주 큰 꿈일 수도 있다. 꿈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전주는 전통문화의 고장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전통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인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들이 판을 벌려 노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다. 당장 가까운 한옥마을 길거리에서도 탈춤이나 사물놀이 공연은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만 만나볼 수 있을 뿐, 평소에는 쉽게 만나보기 어렵다. 여기, 주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 그는 전통놀이를 업으로 삼았다. 그런 그의 꿈은 사람들과 어우렁더우렁 어울리면서 풍물의 맥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을색이 완연했던 날, 한옥마을에서 외국인들에게 탈춤을 가르치고 있던 여현수 씨를 만났다.
전통놀이가 나를 바꾸다
그는 대학에 오기 전까지 전라도도, 전통의 ‘전’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고향은 인천이다. 대학을 군산으로 오게 되면서 처음 전라도 땅을 밟았다.
“학창시절에 공부는 잘 못했어요. 그냥 학교 끝나고 나면, 친구들이랑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한마디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죠.”
그런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대학교 입학하고 처음 가입했던 풍물 동아리였다. 타향에서 접한 전통악기의 소리와 춤은 내성적인 성격의 그에게 처음으로 열정을 다할 ‘꺼리’를 주었다. 하루 온종일 동아리 방에서 북을 치고 장구를 쳤다. 악기를 두드리는 채와 풍물 공연을 할 때 쓰는 소품을 만든답시고 대나무를 자르러 다녔다. 학교에서도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며 노천극장에서 장구 치는 애로 유명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에도 대학에서는 전통분야 동아리들이 많이 사라질 때였어요. 처음에는 풍물을 열심히 하다보니까 탈춤도 추고 싶어지고, 관심분야가 점점 더 넓어지고 다양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풍물과 탈춤, 기접놀이, 굿쟁이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탈춤을 추면서 몸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그때 탈춤으로 몸을 단련해서 기접놀이도 지금처럼 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함께 땀 흘리며 연습하고, 공연 준비하고. 아마도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한 일련의 작업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것 같아요.”
여현수 씨는 풍물, 탈춤, 기접놀이를 모두 할 수 있는 ‘굿쟁이 광대’다. 그는 합굿마을문화생산자협동조합의 길놀이 용기(龍旗)기수이기도 하지만 전주의 강령탈춤전승회와 진안 중평굿보존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판 벌려놓고, 터놓는 그의 속 이야기
현실과 꿈에 대한 괴리를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갭을 좁히거나 둘 중의 하나로 결단을 내리는 실천은 어려운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재밌는 삶’이다. 그만큼 따르는 책임도, 버려야 할 것도 많다. 부모님은 타지에서 풍물을 하고 싶다는 아들을 걱정하셨다. 아들이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에 다니면서 가정을 꾸리길 바라셨을 터.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하고야 말겠다는 ‘용기’를 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반년 정도 풍물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온갖 일을 다 하러다녔어요. 그제서야 처음 아들 노릇을 해드렸던 것 같아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고 나니까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를 해주시더라고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사자탈을 쓰고 ‘어흥!’ 소리를 내지르고, 용기를 휘두르다가 기를 구경꾼에게 맡기고 목을 축이는 너스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의 세월과 시간이 흐르기까지 흘린 땀과, 허허벌판에서 깃대를 수천 번을 휘둘렀다. 그런 그에게 전통은 어떤 의미인걸까.
“전통이 무엇일까요. 제가 살아가면서 봐온, 삶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난 그런 것들이 전통이 아닐까요? 저 또한 인천에 살면서 탈춤이나 풍물굿 같은 것을 봐오면서 자라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에요. 제 또래의 젊은 친구들이 전통문화를 멀리하는 부분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처럼 놀 것도 많은 시대에 뭐하러 옛날 것을 찾겠어요. 오히려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전통놀이를 즐겁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춤을 추고 악기를 쳐요.”
온고지신을 실천하는 젊은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긍정적인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가 부러웠다. 그런 그의 앞으로의 계획은 낮에는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소리도 하며 푸지게 노는 것. 애당초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풍물’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협동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풍물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세대는 아마 우리 때가 마지막일 것 같아요. 희망은 물론 갖고 있죠. 전통이라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나가고 보존해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탈춤에서도 기량을 쌓아 다양한 역할을 하고, 기접놀이도 기술을 좀 더 익혀 전통놀이가 공연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물놀이에 비해 기접놀이는 아직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에요. 우리 지역 고유의 전통놀이가 좀 더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대통령상을 받는 게 제 목표에요.”
지금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빛나지 않는다고 해서 등한시여기거나 함부로 얕잡아보는 건 교만한 행위다. 남들이 쉽게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여현수 씨야 말로 이 시대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 진지하게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여현수 씨를 언제나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