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매혹적이었다. 피카소와 천경자. 전북도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마련한 ‘열정의 시대 : 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는 다시 한 번 피카소를 내세웠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평가보다도 끊임없는 위작 논란으로 거론됐던 천경자 화백의 작품까지.
이번 전시의 특징은 제목에서처럼 유럽과 한국의 모더니즘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서양의 미술사를 학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미술사의 흔적까지 담으려 하면서 내실을 기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계륵(鷄肋)이었던 만큼 아쉬움도 남는다.
도립미술관은 지난달 24일부터 2월까지 4개월간 이번 특별전을 진행한다. 전시 작품은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미술관 소장품 34점, 독일 브뢰한미술관, 무터푸라주갤러리 소장품 51점,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의 소장품 18점을 포함해 모두 104점이다.
전시는 19세기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화법인 아카데미즘의 반발로 등장한 모더니즘을 중심으로 시대별, 주제별로 구성했다. 먼저 인상주의 이전 유럽 전통 회화,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독일 인상주의 베를린 분리파, 한국미술의 모더니즘으로 나눠 배치했다.
전시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면 먼저 인상파 이전의 서양미술의 전통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작품이 선보인다. 이 가운데는 140년 전의 프랑스의 작가 오라스 드 카이아스의 ‘목욕하는 여인’이 대표적이다. 인체와 천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상주의 이전의 전형적인 그림이다.
입체파 피카소의 ‘모자 쓴 여인’과 인상파의 시작과 끝인 모네의 ‘워털루 다리’도 각 섹션의 대표작이다. 다각도의 형상을 한 평면에 구현한 입체주의, 순간의 빛이 만들어낸 풍경을 작가의 주관적 시선으로 거친 붓 터치를 통해 나타낸 인상주의는 모더니즘의 정점이다.
이어 독일 베를린 분리파의 대표작가인 막스 리버만을 비롯한 모더니즘 형성기의 작품이 기다린다. 마지막은 이와 대비되는 한국의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김환기, 박래현, 박수근, 오지호, 진환, 천경자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유럽은 식민지 팽창과 산업화로 풍요로운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시대에 모더니즘이 탄생한 반면 우리나라는 식민지와 해방, 전쟁 등 혼란과 격동의 시절에 서양의 것을 수용하며 발아한 근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도립미술관은 이번 특별전이 지난 2012년 세계미술거장전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보다는 내실을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당시는 판화 작품 위주였지만 이번에는 이를 의식한 듯 대부분 유화 작품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분명 진일보했다. 하지만 작품 수가 전시장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고, 몇 개의 작품으로 거장의 타이틀롤(title role)에 기대기에는 미약하다.
도립미술관의 1~5전시실 전체 면적은 1480㎡로 최대 가능한 회화 작품수는 10호 30점과 100호 203점이다. 이번 전시는 작품 수만으로도 반절에 미치지 못하며, 대부분소품 위주다. 처음으로 들어서는 2전시실에 배치된 유럽 전통회화는 9점이 걸려 그림보다는 공간이 주는 여백이 크게 다가온다. 다른 전시실도 사정은 비슷하다.
사실 이번 특별전은 출발부터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초 독일 바이에른 주립미술관을 통해 고흐의 ‘해바라기’, 세잔의 ‘장롱이 있는 정물’, 모네의 ‘수련’ 등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상주의 유명작을 들여온다는 거창한 포부로 시작했다. 현지와의 사전 협의 없이 세운 계획에 해당 미술관에서는 1점도 빌리지 못하고 베를린과 인근 미술관 등에서 대여를 협의했다. 미술사에서도 생소한 독일 인상주의와 막스 리버만을 중심으로 한 전시로 방향이 지어졌다. 결국 피카소와 모네 등 유명작가의 작품은 2012년과 같은 기획사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국립미술관 소장품을 빌렸다.
현 장석원 도립미술관장이 지난 8월 말 임용된 시점에서 특별전은 90% 이상 진행된 상태였다. 전시를 대폭 수정하거나 무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사이 지방선거로 인사권자인 자치단체의 수장이 바뀌면서 도립미술관은 2달 넘게 관장이 공석 상태였다. 이후 도립미술관은 부랴부랴 한국 모더니즘과의 비교라는 보완으로 전시를 꾸리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도립미술관이 거장전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대규모 전시를 시도를 한 것은 2년 전이다.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 전은 유관기관의 협조, 대대적인 홍보 등으로 관람객 16만여 명, 수익 8억5000만 원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내실보다는 이름값에 기댄 전시였으나 도립미술관의 첫 시도라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이후 도립미술관은 연속해서 다시 해외 거장전을 추진하려 했지만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이듬해 한국의 거장전을 마련했다. 미술계에서는 전년의 실속 없는 해외 거장전보다는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한 획을 그은 대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올해 특별전은 다시 이름값에 기대는 전시로의 회귀라는 점을 지울 수 없다. 거장전이란 이름으로 유명 작가의 작품 몇 점을 끼워 넣는 전시는 한 번이면 족하다. 하려거든 확실한 흥행성을 확보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