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전주 노송동에는 불우 이웃을 위해 돈 박스를 몰래 놓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의 이야기로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2000년 한 학생의 손에 들려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10년 넘게 꾸준히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이 ‘천사’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노송동 주민센터 부근 공중전화박스나 공터 등에 현금이 든 상자를 놓고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리는 식으로 기부를 해왔다. 그동안 ‘천사’가 불우이웃에 써달라고 기탁한 성금액은 어느새 3억을 훌쩍 넘겼다.
‘올해도 나타날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세요! 라는 쪽지만 남기고 말없이 사라질 것인가?’ 등의 이야기는 이제는 한 동네의 훈훈한 미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전주 노송동의 얼굴 없는 천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극회가 ‘노송동 감동스토리-천사는 바이러스’ 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한다기에 공연장을 찾았다. 달동네를 연상하게 하는 집과 계단,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 버린 빨간색 공중전화박스, 동사무소 앞마당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 등 흔히 볼 수 있는 배경을 무대로 소시민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별한 이야기도, 화려한 배경도, 등장인물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해마다 나타나는 노송동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언론의 청탁을 받고 천사의 뒤를 캐는 흥신소 직원 흥반장부터 기부금을 노리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가장한 조그만, 동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고물상을 차지하려는 건달 종세까지 모두 천사가 두고 가는 기부금을 노리고 있다. 천사가 나타날 시기가 다가오자 흥반장과 조그만, 종세는 각자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극은 ‘얼굴 없는 천사’로 알려진 익명의 기부자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자는 귀결점을 찾는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웃음과 행복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의 모습과 어김없이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 ‘노송동 천사’에게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폐지 줍는 일로 살아가는 할머니와 손자, 알콜 없이 하루도 살기 힘들어하는 우리 아버지들 그리고 취업이라는 문틈을 통과하려는 청년들. 하지만 이들을 유혹하는 것은 ‘욕망’이다. 남의 것을 강탈하면서까지 잘 살고 싶은 ‘욕망’, 나 하나쯤이야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욕망’, 실패에 주저앉고 싶은 ‘욕망’ 등이다. 연극에서도 ‘욕망’에 지배받는 이들과 ‘욕망’을 과감하게 포기해버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중심 에피소드이다. ‘노송동 천사’의 기부금 박스를 노리는 이들과 그 계획을 훼방 놓는 사람들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얼굴 없는 천사를 찾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에 관객들은 웃고, 박수 치고, 콧등이 찡해졌다. “기부하는 것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라는 대사에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펴보는 사람들이야 말로 얼굴 없는 천사 바로 ‘노송동 천사’ 다.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
마지막 무대의 종이는 담았던 박스와 노란 돼지저금통은 ‘노송동 천사’의 하나의 흔적일 뿐이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얼굴 없는 천사’라고 부르며 그렇게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기다려왔다. 아마 내년도 그 이후에도 우리는 ‘노송동 천사’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