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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 | 칼럼·시평 [문화칼럼]
우리가 존재를 다하고 더 해 걸어온 길
김병용(작가 / 전북작가회의 회장)(2015-04-01 11:33:31)

 

걷기, 역사 진보의 첫걸음 
인류 진화의 여러 장면 중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하는 순간일 것이다.
두 발보다는 네 발이 훨씬 안정적인데도, 인류의 조상은 어느 순간 앞발을 땅에서 떼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머리는 허리가 받치고 허리는 두 발이 지탱하면서 발바닥은 온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터질 듯이 아팠을 것이다. 또한, 직립의 대가로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껏 몸을 웅크려 보호하는 심장과 폐부, 소화기와 생식기를 고스란히 전면에 내놓는 위험과 수치마저 감수했다. 생명 유지를 위한 기관들을 모두 적 앞에 노출하면서까지 그는 왜 일어섰을까?
더 멀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땅에 머리를 처박은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 멀리 보게 되면, 다시 보이지 않는 소실점 너머의 먼 곳을 상상하게 되고, 상상은 호기심을 낳고 호기심은 마침내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만든다.
마침내 인간은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면서 낯선 풍경을 대하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거나 듣기 위해 소통을 시도했을 것이다. 걸음으로써 낯선 풍경을 만나고, 걸었기 때문에 인류는 집단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공동체 속에서 지식의 집적과 전승이 이루어지면서 인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적 혁명의 길을 지속하게 되었다. 삼장법사나 혜초 스님의 한 걸음 한 걸음… 그런 사이 길[道]은 곧 ‘도(道)’와 동의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걷기를 통해 인류의 역사는 출발했으며 걸음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잇는 통로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걷기의 새로운 발견
교통이 발달하고 난 뒤, 이제 우리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걷지 않는다. 또한 통신 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걸어가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한 교통로와 통신망을 모두 기계에 내준 뒤로, 걷기의 실용적 가치는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걷기는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인간적인 행위. 그리고, 무슨 일이든 실용적인 목적이 소거되면 보다 형이상학적인 새로운 존립 근거를 스스로 생산하게 된다. 현대 미술이 취한 혁명적인 변혁의 배경에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해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된 미술인들의 고뇌가 배어 있다.
이제 사람들은 걸으면서 옆사람이나 풍경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올리비에처럼 ‘실크로드’를 직접 몸으로 재현하기 위해 몇 년씩 걷기도 하고, 메스너처럼 고비사막을 밤낮없이 통과해야 하는 고통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이들도 생겼다. 
우리에게도 도보 무전 여행이나 ‘국토 순례 대행진’처럼 오래 된 걷기 여행 붐이 있었고, 한때 문학 기행이나 역사 기행이 각광을 받기도 하였으며, 요즘은 각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둘레길’이나 ‘순례길’, ‘올레길’과 같은 워킹 트레일이 날이 다르게 개척되고 있기도 하다. ‘좁은 국토, 내 발로 밟으면 훨씬 더 넓어진다’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고 매력적이다.
요즘은 이름조차 낯설었던 잉카 트레일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구마노 고도와 같은 해외 순례 코스를 다녀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생태의 보존이나 지속가능한 발전과 같은 시대적 화두와 옛길을 활용한 도보 여행의 결합은 역설적으로 첨단문명에 지쳐서 걷고 싶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길을 걷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길을 걷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된 시대가 된 셈이다. 
이는 ‘길’이나 ‘걷기’에 대한 우리 생각의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개발되고 있는 각종 도보 길의 설계(?)에 깊이 반영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평야부가 많은 우리 지역은 더욱 그렇다. 평지에서는 이전에도 가장 효율적인 이동 동선을 고려해 길을 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길을 더 넓혀지거나 더 반듯하게 펼쳐졌다. 즉, 옛길을 새 길이 덮은 것이다. 따라서, 도보 여행객을 위한 길의 대부분이 찻길의 가장자리가 되어버렸다. 오래된 산길에는 잘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는 어떤 풍광들이 우리 지역에는 아스팔트 밑 깊은 지층 아래 묻힌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억지 스토리텔링에 반대한다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그로 인한 대규모 인구 이동의 결과, 한반도의 곡창이었던 우리 지역은 가장 극심하게 인구 유출을 겪은 지역이 되었다. 거주자가 줄어든 농어촌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존립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고, 이후 농어촌에 대한 국가 정책 또한 상당 부분 ‘보여주는 농촌’, ‘찾고 싶은 시골’과 같은 패러다임 하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근래 각종 지자체에서 만들고 있는 ‘도보 여행길’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길 위에서 걷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기 원한다. 그게 사람들이 걷기 시작한 이유였으니까… 그 결과, 각 지자체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나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이런 시대적 추세에 부화뇌동한 학자나 문인들은 그야말로 그동안 세상에 없던 새로운 스토리를 세상에 내놓아 잠시잠깐 관광객 유인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상술에 편승한 파워 블로거 역할을 한 셈이다.
그 효과가 오래 갈 리 없다. 전국에는 현재 지자체 수보다도 훨씬 많은 400여 개의 트레일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중 대부분의 길에는 하루 종일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연 풍광이든, 역사나 문학 콘텐츠이든 걷기에 대한 보상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개발되자마자 잊혀져가는 길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한반도는 좁은 곳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방을 손자가 물려받는 게 오래된 우리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 방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삶이 공존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국토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 이야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이처럼 콘텐츠가 빈약한 길들을 양산하는 것일까…?
길이 보유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무시하고 그저 탐방객을 위해 억지로 화석화된 콘텐츠만을 지도 위에서 이어 붙여 길을 설계한 탓은 아닐까… 반성할 일이다. 
거듭, 후손은 선조가 이룬 바탕 위에서 살아가고 또 후손을 위해 터전을 넓혀줬다. 이 땅은 그 자체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역사적 지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지금도 우리 삶이 꽃피고 있다.
살아있는 이야기, 존재하는 이야기, 진행 중인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저 ‘오래 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일에만 골몰하다보니 정작 거기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조차 데면데면한 풍경의 일부처럼 방식의 도보 여행 길은 더 이상 만들어져선 안 된다.
이야기는 사람의 것이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야기가 꽃핀다. 우리들은 궁금해서 걷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걷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걷는다. 
세계 도보 여행객들의 성지처럼 이야기되는 산티아고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가 성 야고보의 무덤 때문일까? 오히려 함께 걷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정교하게 쉴 곳과 숙소를 마련해준 길가의 주민들이 있기에 다름 염려 없이 자신의 두 발과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는 탓은 아닌 것인지… 깊이 생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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