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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2 | [문화저널]
옛말사랑 있다고 네끼 먹고 없다고 두끼 먹나
김두경 서예가(2003-09-16 16:39:01)
시내 중심가 밤거리를 나올 일이 별로 없는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늦은 밤거리를 헤맸습니다. 모처럼 일이 있어 나갔다가 발길이 닿는 데로 그냥 흘러 다녔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었습니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인지 잠들지 못하여 깨어 있는 것인지 얼른 분간이 서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분주하고 반짝거렸습니다. 어느 길 어느 골목을 들여다봐도 모두들 저마다의 빛나는 얼굴과 목소리로 모든 것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따라 흐르지 못하는 나는 자꾸만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는 돌멩이가 되어 이리 저리 채이며 떠미릴고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도 눈을 감아도 세상은 현란하기만 한데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서 우는 늑대처럼 춥고 외로웠습니다. 모두들 즐거이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또 더 맛있고 더 즐겁고 더더욱 번쩍거리는 것을 찾아 분주히 흐르는데 찬바람은 내 야성의 갈기를 사정없이 헤치며 달려들어 나는 자꾸만 벼랑 끝으로 밀려갔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왜 당연한 듯 섞이지 못하는 것일까? 특별히 섞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돼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도대체 사람은 왜 그렇게 밤을 밝히며 분주하게 무엇을 하는 걸까? 어찌 생각하면 이러한 현실에 빠져들지 못하는 나는 세상을 너무 소극적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도 되지만 생각하면 살수록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많이 하며 살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포장지(-옷)가 좋다고 사람가치가 얼마나 올라가며 설령 올라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 리요, 또 좋은 음식 골라 먹은들 얼마나 무엇을 탐할 수 있으며 육신을 유지해주면 그만이지 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 말씀에 있다고 네끼먹고 없다고 두끼 먹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어려웠던 시절에 없어서 끼니를 거르는 일도, 며칠씩 굶는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 쉽게 생각할 말씀 아닙니다. 좋게 입고 맛있게 먹고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이미 칫발이 서 있습니다. 핏발서게 노력해서 그것을 소유하고 사용하지만 그것들이 없을 때보다, 나아진 것은 육신이 조금 편해졌다는 것뿐입니다. 혹시라도 육신이 편해지면 정신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말씀할 분도 계시겠지만, 글쎄요? 조금은 편해질지 몰라도 육신이 편해진 만큼은 아닐 겁니다. 건물 높이만큼 그 그림자도 따라서 자란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소유의 아름다움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절제의 아름다움은 자각해야 하지 않을런지요. 지금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물질의 절제로 해결이 가능하다 말씀드린다면 황당하실런지요. 평범하지만 속 깊은 옛 말씀 '있다고 네끼 먹고 없다고 두끼 먹나!'라는 말씀 깊이 생각해 보심이 어떻실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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