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한 씨는 영화인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영화현장 일선에서 촬영 스탭으로 일했다. 고향 전주로 내려와서도 영화촬영은 계속하고 있다. 재한씨는 스튜디오를 가지고 활동하는 현업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제품사진을 찍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재한 씨는 누군가에게 손길을 내미는 ‘이름 없는 학교’의 운영자이기도 하면서 ‘손가락 거는 남자’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기도 하고 저 사람이기도 한,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감 잡기 힘든 남자였다. 적어도 영화의 거리 한 복판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게 분명해졌다.
촬영감독의 꿈, 모든 기회는 후배에게
재한씨는 촬영감독을 꿈꾸는 영화청년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언젠가는 자신이 촬영한 영상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꿈이 있었기 때문에 며칠 간 밤을 세워가며 이어지는 강행군 촬영이나 형편없는 처우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재한씨를 괴롭히는 일은 따로 있었다. 같이 일하는 후배들의 고된 일상이었다. 후배들이 삼시세끼 해결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렸다. 월세를 내지 못해서 외벽 배관을 타고 올라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 후배도 있었다. “저한테 입봉기회가 7년 동안 세 번이 왔어요. 근데 그 세 번 다, (같이 일하는)이 친구가 잘해요. 저는 아직 부족하고. 왜냐면 예술 하는 애들은 뻔히 그걸 알거든요. 그래서 양보한 거고, 저는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 사는데 얘는 현장에 밥차가 안 오면, 일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애였어요. 근데 그런 애들 눈앞에서 뻔히 보는데, 그게 뭐 착하고 안 착하고가 아닌 거에요”
입봉은 상업영화에서 정식 계약을 맺고 촬영감독을 맡는 걸 뜻한다. 그래서 촬영스탭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게 바로 입봉이다. 문학으로 치면 정식 등단과 같다. 그런데 재한씨는 그런 기회를,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두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자신이 입봉 기회를 받아들이고 촬영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히면 후배들에게 더 큰 힘이 되진 않았을까. 혹은, 그게 더 ‘효과적’이진 않았을까. “제가 성공하면 그만큼 더 베풀 수도 있죠. 맞아요. 그게 그 친구한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거에서 정말 줄 거면 진짜 귀한 걸 줘야 한다고 항상 생각해요. 밑에 있는 애들 끌어 올려주는 게 저는 또 너무 행복하고, 그리고 그 애를 집어 던져서라도 위로 올릴 수 있는 게 너무 감사하고” 세상이 각박하다 보니 SNS 릴레이 캠페인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 시대다. 그런데 재한씨는 단단한 껍질 속에 고이 간직해 왔던 촬영감독 꿈을 후배들에게 서슴없이 양보했다.
낙향과 본격적인 나눔의 삶
영화현장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온 재한씨는 지역방송국에서 송출업무를 담당하는 일을 시작했다. 급여나 노동 강도를 비롯한 전반적인 근무여건은 영화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2년만 지나면 주조종실 정규직 직원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진 빚을 어느 정도 다 갚고 나자 딴 마음이 생겼다. “빚도 다 갚고 조금 지나니까 슬슬 올라오더라고요. 그런 마음이 슬슬 올라와서 때려 치고 시작하게 된 거에요.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했죠. 다들 못해서 안달인데” 방송국에서 일한 지 채 1년도 안 돼서 슬슬 올라왔다고 한 건 다름 아닌 나눔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재한씨는 방송국 일을 관두고 태평동 공구상가 끄트머리의 천변 쪽에 포토카페를 차렸다. 가장 큰 목표는 카페영업 매출을 늘리는 게 아니었다. 1년에 한 명씩 아이들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해지면 들어갔는데 지금 애들은 늦게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올 수 있도록 만들어놓고 그랬죠. 그랬더니 조금씩 오더라고요. 와서, 뭐하는 데에요, 물어보고, 커피도 공짜로 주고, 그러면서 이름 없는 학교가 시작됐어요”.
함께 해서 가능한 일
태평동 포토카페는 기대 이상의 영업실적을 보여주긴 했지만 결론은 적자였다. 재한씨는 결국 궁리 끝에 대출을 받아 영화의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1층은 카페를 하고 2층에는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스튜디오 공간은 이름 없는 학교의 아지트로 병행해서 활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리행위와 비영리행위를 동시에 하자니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결국 카페는 포기하고 2층 공간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재한씨의 활동과 공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찾아오는 아이들도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혼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재한 씨는 자신의 활동을 주변에 알리고 동참해줄 선생님들을 찾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름 없는 학교가 운영되는 방식은 이렇다. 일단 이름 없는 학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만나서 얘기를 들어본다. 학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직업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학교는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를 수소문한다. 만약 이름 없는 학교의 선생님 중에서 나설만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연결이 된다. 선생님들의 직업은 음악학원장, 간호사, 대학생, 사회복지사, 교사, 언어치료사, 옷가게 사장, 대학생 등 가지각색이다. 심지어는 백수도 있다. 전주에만 22명의 선생님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데 학생 한 명이 나타나면 22명의 선생님 모두가 그 한 명의 학생을 돌봐주기 위해 힘을 모은다. SNS로 연결되어 있는 선생님들 중에서 맞춤한 선생님을 찾지 못하면 재한씨가 직접 찾아 나선다. “요리사가 꿈인 애가 있었는데 한식인지 양식인지도 정해놓지 않은 거에요. 그럼 일단 맛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럼 중식, 한식, 경양식 이렇게 찾아가서 음식을 먹어보는 거에요. 그런데 공짜로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 작업을 일단 해요, 사비로. 그 다음에 다시 그 애를 데리고 찾아가서 말씀을 드려요. 그러면 크게 거절하시는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나 이름 없는 학교의 학생이 될 수는 없다. 집안 형편이 안 좋거나 왕따경험이나 자살충동 등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이 중 한 가지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이름 없는 학교를 찾아올 수 있다. “정신적인 상처를 갖고 있거나 자살충동이라든지 폭력성이 있다거나, 대부분 그런 친구들이다 보니까 기술을 가르치는 게 한 20%밖에 안 돼요. 선생님들이 에너지를 쏟는 게. 나머지 80%는 감정을 추스르고 사람들 유대관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소위 말해서 삐뚤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나빠서 그런 게 아니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거거든요. 기술은, 그 친구가 뭘 하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럼 그 전문가를 찾아서 연결을 해주죠”
이름 없는 학교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
“저 말고 이걸 보고서 누가 하고 싶으면 아무나 하라고요. 저희처럼 형으로서, 선생님으로서 도와주고 책임지고 그러려면 누구나 하라는 의미로.” 이름은 사물이나 사람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건 한정(限定)이 된다는 뜻이고, 이름이 있다는 건 이름을 붙인 소유주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이름은 고유명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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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한 씨가 학교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유도 그랬다. 나눔을 실천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활동이 개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 그래서 이름 없는 학교에는 따옴표를 붙일 수가 없다. 이름이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이름이 생기고 하면 결국 돈이 뭉치고 명예가 뭉치고 욕심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욕심 없이, 학생들 꺼라는 생각으로 이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재한씨는 나눔을 실천하는 자신의 삶이 언젠가는 그릇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 그에게 작은 실천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영롱한 빛을 띨 뿐이다. 휘황찬란한 섬광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눔의 에반젤리스트
촬영감독의 꿈과 영화제작 현장에서 보내온 7년의 시간을 후배들을 위한 양보와 맞바꾼 영화인. 이름 없는 학교의 뜻을 선생님들과 같이 하며 손길을 베풀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사진 나눔을 하며 세끼 꼭 챙겨 드시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사진작가. 그리고 그게 시작이 되어서 지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누군가와 손가락을 걸고 한 가지의 작은 선행을 약속 받는 손가락 거는 남자. 한 사람에게 하루에 한 가지의 소소한 선행을 약속받으면 1년에 365개 선행의 물결이 출렁일 거라는, 단순한 산식(算式)에 의존하는 사람. 아무런 대책 없이 오로지 함께 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돌진하는 돈키호테.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나눔의 복음을 전파하는 에반젤리스트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떨어뜨리는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 마더 테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