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저널초점]
문민정부 1년을 본다
집단 이기주의로 점철된 구습의 되풀이
김영호 전주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학(2003-09-19 09:35:56)
짧은 지면을 통해 지난 한 해 동안의 한국 언론계를 진단한다는 것은 무리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우리 현대소속에서 93년이라는 해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언론은 과연 그 소임을 다 했는가를 총체적으로 평가해 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찾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93년은 30여년에 이르는 권위적 군사정권의 종식과 문민정부의 출범 그리고 문민정부가 내세운 개혁의 바람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언론의 공과를 돌아보자면 먼저 김영삼 정부의 개혁의 성격과 한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지면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곧바로 개혁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만 논의하도록 하겠다.
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언론은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개혁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으며 정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려는 오랜 습관을 되풀이하다가도 자신들의 이익에 어긋날 때는 반개혁적 태도로 돌변하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냈었다.
또한 언론은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며 개혁의 나팔수 노릇을 자임하면서도 정작 자기 개혁엔 지극히 인색한 이기적 태도로 자신들을 향한 개혁의 화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한 덩어리가 되어 기민하게 대처하는 약삭빠름을 보여 여전히 개혁의 무풍지대에 안주한 채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뛰어난 변신술과 처세술을 보였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에 대해 비록 철학과 역사의식이 결여된 1인 독주식 즉흥적 개혁이니, 미리 표적을 정해둔 사정성 개혁이니 하는 비판은 있었지만, 문민정부 출범 초기 대다수 국민들은 과거 성역으로 존재했던 권위들이 무너져 내리는데 대한 일말의 통쾌감과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는 대통령 개인의 인기로 연결되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조사 결과 현직 대통령이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로 뽑히는 사상 유례없는 이변이 벌어질 정도로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과거 총칼로 권력을 휘어잡은 독재 정권하에서도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던 언론이 이처럼 국민적인 인기까지 누리는 대통령을 향해 감히 비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서로 질세라 충성과 찬사의 경쟁에 열을 올리기에 분주한 것은 뻔한 일이다. 더욱이 그 대통령이 자신이 언론을 향래 '개혁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을. "언론의 도움 없이는 개혁의 성공도 없다"고 간곡하게 부탁까지 한 처지이고 보면 언론은 일제히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며 스스로 '개혁의 홍위병'임을 자처하고 나서 벌 떼처럼 몰려다니며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죄과를 두리뭉실 묻어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밀원관계는 언론 역시 개혁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정부의 위협성 경고가 터져 나오면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들 스스로를 개혁의 동반자 정도가 아니라 일정 부분은 주체라고 여기고 있던 언론에게 있어서 언론을 개혁대상의 하나로 지목하는 듯한 정부의 의도는 자존심이 심각한 손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어쩌면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뒤이어 빠징코 비리에 언론사 사주 및 간부들이 관련되어 있다느니, 언론사 및 간부들도 재산공개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구체적인 사안들이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김영삼 정부 출범초기의 정부와 언론과의 밀원관계는 서서히 냉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영삼 정부와 노골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서보았자 별로 이득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언론은 여론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통령의 정치스타일을 역이용하여 '개혁의 발목잡기'식 여론을 지속적으로 조성함으로써 이를 통해 자신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과시하려는 듯한 반개혁적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언론의 반개혁적 행태의 구체적 증거로는 금융실명제의 전격적인 시행 이후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위기감을 조장시킨 '10월경제대란설(經濟大亂設)'과 정부각료 중 개혁적 성향을 보인 통일, 노동 등 각료들에 대한 집요한 공격으로 결국 도중하차를 시키고 만 것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개혁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언론이 비판받아야 할 대목은 가지 개혁에 지극히 인색하다는 점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언론은 정부로부터 탄압받는다는 이미지 하나 만으로 도덕성에서 정부에 비해 떳떳하고 국민들의 동정표 어린 성원으로 '그래도 우리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언유탁을 통해 언론사 내의 양심 있는 언론인에 대한 탄압칼자루를 휘두르는데 주저치 않았으며, 부도덕한 정권 핵심부에 재빨리 합류하는 기회주의적 언론인들을 양산하였을 뿐 아니라, 언론기업은 금력에서 날로 비대해져 재벌급 규모로 성장하는 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일개 신문사가 제1야당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르고도 끄떡 않는 막강한 힘을 과시할 정도로 정권에 버금가는 권부(權府)로 성장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스스로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자신들의 힘만 믿고 개혁의 동반자로 무임승차하려 한다면 얌체도 보통 얌체가 아니며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직자의 재산공개에는 그렇게 열을 올리다가도 언론사와 간부들에 대한 재산공개가 거론되자 언론통제로 몰아붙이며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가 하면, 해직 언론인 원상 회복문제 등도 흐지부지 하세월이다.
그런가 하면 발행부수공사제도(ABC)라는 자신의 이익과 밀접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약분쟁을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붙이던 언론이 자신들의 밥그릇과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까지 동원하여 공방을 주고받는 추태를 보여 왔다.
이러한 언론의 본성과 관련된 큰 흐름 외에도 지난 한 해 동안 언론계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대충 굵직한 사건들만 돌아보더라도 서해훼리호 백선장 생존 오보사건은 우리 언론의 무한 경쟁으로 인한 고질적 병폐를 다시 확인시켜준 사건이었으며, SBS의 출범이후 선정성을 주 무기로 한 방송사들의 무분별한 시청률 경쟁은 급기야는 'TV끄기 운동'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어 수용자 운동의 새로운 진기가 되기도 하였다 .
또한 지난해에는 케이블TV프로그램 공급업자 및 종합유선방송사업자가 선정되었으며, 금년 상반기 중에 지역민방의 주체까지 확정되면 향후 수년간에 걸쳐 방송계에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특히 최근 거론되고 있는 방송구조 개편에 관한 논의는 아직은 그 윤곽이 확실치 않으나 과거 정권에서 자행되었던 '방송장악하기'의 일환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며, 다매체 다채널, 무한경쟁시대에 있어서의 '교통정리'라는 성격으로 방송의 공공성 회복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것은 사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앙의 거대 언론사를 겨냥했던 화살이 힘겨루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던지 지방언론사로 향하면서 부조리와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받은 지방언론사의 경영진 및 기자들이 사이비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구속되는 사태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수년간 지방언론사의 난립으로 인해 물의를 야기시킨 언론사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수긍할만한 조치이긴 하지만, 만만한 송사리만 잡아들이고 덩치 큰 고기는 손도 못대느냐는 항변이나 '좀도둑'형 사이비 언론도 문제이지만 국민여론을 오도하여 '큰도둑'형 사이비 언론에 대해서는 언제까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비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사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93년 한 해 동안 우리 언론은 확고한 철학도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도 없이 오직 오랜 세월동안 체질화되어 온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충성 경쟁에 열을 올리다가도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작용할 일에 대해서는 재빨리 등을 돌리는 보수주의와 자사(自社)이기주의 때로는 집단이기주의로 점철된 구습을 여전히 되풀이 한 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이 대통령 한사람의 개혁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절실한 과제로서 이의 성공 없이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면, 언론의 개혁 없이 개혁의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언론의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부릅뜬 눈으로 언론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압력을 가해서라도 언론을 바로 세우는데 힘과 지혜를 결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