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내 직업의 역사와 관심 탓이겠지만, 강준만 교수의 저술활동과 주변의 반응을 따라가다 보면 담박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의 내용과 글쓰기의 형식이 서로를 조율하는 긴밀한 교호(交互)다. 그것은 육성의 스타일을 거듭 길러나가는 고민과 모색의 체취이기도 하다. 글과 뜻 사이의 긴장을 지속하고, 그 긴장의 경계 부단히 넓혀가는 글쓰기의 실천 앞에서는 앎과 삶의 소통을 외치는 모든 선언들마저 사뭇 무력하다. 뿌리없는 계몽기를 거치면서 우리 근대정신사는 절맥(絶脈)되고, 근대화·서구화의 첨병노릇 속에 정신문화의 식민성이 내면화 되어 있는 지금, 이웃의 공과를 따지고 그 자리를 매기는 강 교수의 작업은 오히려 낯설고, 아직 실험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계속된다. 그러나 강교수가 스스로 지적하듯이, 정당한 '기록과 평가'를 위해서도 그 실험은 계속되어야 하고 또 쌓여야 하며 나름의 풍경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원칙상, 앎의 권리원전인 삶터와 그 역사를 잃어버린 채 수입계몽의 와류 속을 정신없이 부대끼면서 개성과 구체성을 오히려 비학문성의 증표로 정죄했던 과거의 풍토를 잣대로 삼아 그의 작업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바로 그 잣대와 '틀'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무릇 기준과 틀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희생이 필요하며 당대의 타성에 의해서 외면받는 법이다. 특히 우리처럼 공공성의 영역이 빈약하고 매사가 사사화(私事化)되기 쉬운 풍토에서는 개혁의 목소리가 흔히 비틀어진 자의식의 표출로 오인되고, 그 사회적 공능(公䏻)은 외면당한 채 감상적 심인(心因)으로 환원되기조차 하는 것이다.
판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일지 모르지만, 당연히 틀을 바꾸려는 그의 '솜씨'를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문자적 계몽과 과잉상태인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흔히 접하게 될 비판이다. 가령 그의 글 중의 일부는 느슨하고 감성적이며, 그 뜻 중의 한 구석은 편협하과 독선적으로 비치리라. 이러한 지적이야 온당 토론을 거칠 일이며, 그는 '논쟁 메이커'라는 벌호처럼 좌충우돌하면서 전방위적으로 논쟁의 징검다리를 만들어가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우리 삶의 터와 역사에서 자생하는 공적 담론영역 확보를 위해서라도 마땅히 솜씨를 두고 논쟁을 펼 일이며, 아울러 어느 누구없이 논쟁의 솜씨를 길러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정작 중요한 대목은 그의 글과 뜻이 만나는 접점과 그 접점이 열어주는 지평에 있다. 그것은 삶의 파토스와 앎로고스 사이를 가로지르는 글쓰기의 에토스, 그리고 이로 인해 알려지는 새로운 지평이다.
강준만 교수가 정열적으로 펴내고 있는 <인물과 사상> 연작의 1권에 표명된 출사표는 나의 추상적인 주석과는 다르게 전공실무적이며 또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책들을 섭렵하면 나의 추상은 그의 주체 속으로 풀어지며, 또 구체는 일관된 실천의 원리로 다듬어져 간다. 그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 언론의 자유는 없으며,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언론의 그늘 아래 서식하면서 획일적인 기존언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기좀 언론매체의 지배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히 지식인들이 책을 언론매체로 신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자신이 제안하고 실천하는 '저널룩'이야말로 인스턴트 저널리즘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소기의 성과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가 택한 길은 위험해 보인다. 그것은 상업적 선정주의와 고답적 전문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이어서, 어느 판으로부터도 고운 시선을 받기 어렵다. 그 질서는 좌와 우, 첨단과 수구, 도덕주의와 향락주의, 전문가 의식과 대중주의 등 온갖 종류의 경직된 이원법에 묶여 건강하고 풍성한 근대성의 내면 풍경을 가꾸지 못한 우리 모습과 일치한다. 기존 영역들을 넘어 경계를 넓혀가기 - 우리 사회에서 이 일은 늘 위험한 실험이다. 그 곳의 지반은 불안하고 몸을 숨길 지형지물도 없이 비판에 취약하며, 시금석이나 과녁은 안개 속에 가려 걸음은 휘청인다. 기존의 틀과 잣대에 불만을 품는 일이 늘 그러하듯이 어느 편 속에 안주하지 않은 채 홀로 분주히 경계를 넓히는 일은 불온하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과 열성이 나름의 무게를 안게된 지금 그 위험의 고비는 어는 정도 넘긴 듯하다. 정작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암(癌)처럼 장기적일 것이며, 그것은 작업의 내실을 챙겨나가는 '솜씨'와 이를 갈무리하는 자기 성찰상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물과 사상> 연작은 무엇보다도 우리 삶과 앎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평가에는 인색' 하고, 수입과 유통에 기민한 우리 정신문화계의 '근대적' 관행을 배경으로 해서 그 가치가 부각된다. 정신문화의 여러 꽃과 열매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아름답고 건실한 모습을 일구며 자생력을 키우는 것은 바로 '기록과 평가'의 경쟁터가 이루어질 때이기 때문이다. 가분수의 학자들, 기지촌의 지식인들, 고문관(顧問官) 아카데미션들이 켐브리지와 파리의 수입품에 아직도 연연해 있을 때, 그는 줄기차게 전주와 대구를 이야기하면서 기록과 평가의 문화가 정착하는데 나름의 몫을 해내고 있다. 세계화, 나아가서 섣부른 역사의 종말까지 외치는 지금, 그러나 아직도 시급한 과제는 우리 정신문화의 자생력과 주체성이겠기에.
강준만 교수의 작업에는 '실험'이 갖는 장단과 영욕의 혼고적이 고루 보인다. 그러나 실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무릇 모든 진보는 실험의 자식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