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문화비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대학은 친목단체인가?
강준만(2003-09-19 09:41:57)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정의 거센 바람이 몰아친 게 엊그제 같은데, 국회 노동위 '돈봉투'사건을 비롯하여 부패의 의혹이 큰 사건들이 일어나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정치는 쇼'라고 하는 체념의 지혜를 터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쇼'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원칙과 정도(正道)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일시적인 바람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비단 정치권에만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크기와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타성을 원동력으로 삼아 표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라는 상식의 이면엔 극도의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가 전반적인 개혁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개혁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다. 김영삼정권이 '개혁'을 전세낸 것도 아닐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개혁'하면 으레 김영삼정권의 한계를 지적하기에 바쁘니 그것도 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김영삼정권과는 무관하게 개혁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연히 개혁의 구호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전제로 하여 그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럴 경우 우리가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느 부문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까?"이어야 한다.
부패와 비능률의 정도가 큰 걸 기준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는 건 그럴듯해 보이긴 해도 그건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부패와 비능률의 정도가 가장 약한 부문이라 해도 그 부문이 개혁의 파장을 확대시키는 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런 부문의 개혁이 선행되는 것이 옳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대학개혁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식인 집단의 본산이라 할 대학이 개혁돼 대학의 모든 지식인들이 개혁의 파수꾼이자 일꾼으로 나선다면 개혁은 후퇴할 수도 없고 왜곡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 대학이 다른 부문에 비해 비교적 깨끗하다는, 아니 덜 타락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개편을 외면해 온 감이 없지 않다. 지금 시도되고 있는 대학개혁도 교육부가 주체가 되어 '위에서 아래로'부과 되는 것이지 대학의 자율적 각성과 의지에 따른 게 아니다.
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른바 '강의 평가제'만 하더라고 그렇다. 그건 학생들이 몇 년 전부터 교수들에게 집요하게 요구해 온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은 일부 학생들이 강의 평가제를 악용할 위험이 크다 하여 '시기 상조론'을 내세우면서 완강히 거부하였다. 강의평가제가 무슨 운동권 학생의 투쟁 전술정도로 간주되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제 교육부가 나서서 강의평가제를 요구하자 강의평가제에 반대하던 교수들 대부분 교수들은 "세상이 벌써 그렇게 달라졌냐?"하는 놀라움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학생들의 요구는 일단 교수들에 의해 불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면서도 교수들은 정작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일부 학생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들엔 교수와 학생 사이의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학생들은 힘으로 밀어 붙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에 젖어 있고 교수들은 그 어떤 공무원 집단 못지않은 무사안일주의 나락에 빠져있다.
교수 집단의 무사안일주의는 특히 지방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 지방대학 교수들의 무사안일주의가 더 심각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방의 경우 서울과는 달리 양적으로 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인적 자원이 대학교수들이라는 것이다. 즉 지방에서 교수들이 팔짱을 끼고 그 사회를 바라보는 한 그 어떤 개혁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지방 언론은 구조적으로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다른 집단달도 지방 특유의 인맥과 학맥의 수렁에 빠져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있다. 신분과 수입이 확실하게 보장되었고 외부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직업상의 특성상 '정의'와 '진리'를 역설하는 교수들이 언론을 포함해 모든 비판의 기능까지 맡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방대학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학교수들은 비교적 사회적 존경도가 높고 안정된 직업인으로선 나무랄 데 없지만, 문제는 오히려 그들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삶에 안주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자신이 지역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실천에 옮기는 대학교수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교수직을 단지 편하고 좋은 직업으로서 향유하고자 하는 교수들의 타성에 일대 변화가 일지 않는 한 지방의 개혁은 물론 발전은 영원히 기대하기 어렵다. 배타적인 파벌주의에 오염돼 '친목단체'로 전락한 감마저 없지 않은 교수집단의 의식에 변화가 없는 한 학생들의 교육도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
사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전반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나가서 이권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학맥을 공고하게 다지는 친목단체의 성격이 강하다.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까지도 대학생활에서 공부보다는 친목도모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교수나 학생 할 것 없이 실력보다는 인간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데, 그 인간성 이라는 게 '사회정의추구'와는 전혀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것에 대해 적대적인 개념이라는 데에 우리나라 대학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사사선건 원칙을 따지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인간성이 별로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교수집단이 무슨 로비단체도 아닐 터인데, 왜 그렇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발 넓은 사람이 그 집단에서 대접을 받는 건지 그건 참으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런 능력은 개인의 처세에만 이용될 뿐 대학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역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이 로비스트나 정치인들의 집단과 다를 바 없는 조직논리에 의해 지배된다면, 그런 대학은 사회발전에 암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건 대 학교수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의무와 사명을 방기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적인 기능을 해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역사회는 상호 독립적이고 상호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각 분야가 지방 특유의 인맥과 혈맥으로 인해 깊게 '유착'왜 있으며, 대학교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 유착의 고리를 깨지 않는 한 지역발전은 늘 기득권자의 발전을 의미할 뿐이다. 교수든 학생이든 대학의 환골탈태가 절실히 요청된다 아니할 수없다.
강준만 / 전남 목포에서 56년에 태어나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 신문학과와 위스턴신대 신문방송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론 비평문화를 뿌리내리는 작업에 큰 역할을 해오고 있는 그는 저서로는 「한국 언론과 민주주의의 위기」「권력은 TV에서 나온다」외 다수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