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고 숨막히는 대선이 끝나고, 그리고 우리는 웃고, 그리고 숨죽인 국가부도 위기 속에서 한고비를 넘겼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말을 듣고 다소 안도의 숨을 고른 후, 우리는 영화를 보러 국도극장엘 갔다. 지난 해 25일이었다.
내 평생에 나는 무슨 기념일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았다. 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나 아내 생일에 대해서 나는 한 번도 무슨 행사를 해 본적이 없다. 내 생일은 늘 어머님이 챙기셔서 미역국을 먹으면 되었고 아내 생일은 지금도 모르고 부모님 생신을 아내가 알고 있다. 누구에게 나는 무슨 날이라고 해서 선물을 주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느 내 생일도 아내나 어머님이 챙겨줘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슨 기념일을 내가 알았다고 한들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다. 왜 어쩔래. 그렇다고, 우리 결혼 기념일을 내가 모르고 그냥 지났다고 해서 나는 여태 아내에게 한 번도 서운하다는 무슨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주까리 진돗개라고? 그래 우린 그렇게 기념일 없이 산다.
지난 해 12월 25일도 우린 그저 무슨 비디오나 빌려다 볼까하며 방바닥에서 뒹굴뒹굴하며 비디오 집에서 나온 비디오 안내 팜프랫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로 안 본게 하나도 없어서 우린 <마지막 방위>를 빌려다 보았지만 녹음 상태가 영 엉망이어서 재미가 없었다. 아, 그렇지 <올리브나무 사이로>를 빌려다 볼까.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그리고 놀고 있는데 도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사람들이 내 취미가 무어냐고 묻길래 나는 한참을 고민해도 내 취미가 무어냐고 묻길래 나는 한참을 고민해도 내 취미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도현이한테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더라, 나는 최소한 하루에 한 번씩 도현이에게 전화를 하는데, 전화 내용이래야 별 것이 아닐때가 많다. 그저 "야, 도현아 내 산문집이 말이여, 며칠만에 몇 부가 나갔다는디 그러면 많이 나간 것이냐" 그러면 "거 뭐 그런 셈이지요" 하는 싱거운 대답을 듣거나 아니면 그냥 별 '내용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거리다 끊는다. 내 전화 취미가 얼마나 그성이냐 하면 도현이가 인도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외국, 그것도 인도까지 도현이에게 전화를 다 했었다.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참 신기하기만 하다. 인도에서 도현이에게 편지가 왔는데 거기 전화번호가 있지 않은가. 나는 옳다구나 거기 적힌 대로 또도도도또를 했는데 웨매, 덜컥 전화가 걸리지 않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거기 도현이 있소, 했더니 그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아 글쎄 안도현입니다. 그러는 게 아닌가. 야, 너 도현이냐 근디 어떻게 이렇게 담번에 인도까장 전화가 걸려분다냐. 나는 참말로 놀랬던 것이다. 거기가 전주 평화동도 아니고 서울도 아니고 인도가 아닌가 인도까지 전화가 갈려면 적어도 몇 군데는 거쳐야하지 않는가. 나는 그랬던 것이다.
그러고 저러고 간에 <올리브나무 사이로>를 다보고 있는데 도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영화보러 갑시다. 좋지, 근디 무슨 영화? 편지요. 식구들 다가냐. 야헌 장면 없냐. 유경이도 간다냐. 그런 장면 없다는디요. 그려 글면 글자. 차 갖고 나갈래? 아니요. 그려 아이엠에프다. 글면 3시에 국도극장에서 만나자. 우리 식구들은 아이엠에프 시대를 사는 국민으로서 이것저것 따져 택시를 타고 갔다. 다른 때 우리는 늘 극장부근에 있는 주차장에다가 주차를 하지 않고 무슨 창고 앞 공터에다가 공짜로 주차 하고 영화를 보았는데 오늘은 그냥 택시 타고 가기로 했다. 택시 운전수가 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한참을 걸어 국도극장엘 갔다. 도현이네는 아직 오지 않아 내가 유경이 표까지 다섯 장을 끊었다. 민세 민해 민혁이는 공짜였다. 언젠가 우리는 이 극장에서 우리 두 부부끼리 <노는 계집 창>을 보았었다. 그 영화는 '야'한 장면이 많다고 해서 애들은 집에서 놀게 했었다. 아무튼 도현이네가 오기 전에 안사람은 평소 그답게 "내가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놓을께" 하며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랬다. 안사람은 늘 어떻게 하든지 아무리 만원이드래도 자리를 잘 잡곤 했다. 어떻게 자리를 그리 잘 잡냐고 해도 아내는 "그냥"하기만 했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놓아고 우뚝 서서 "여보, 여기야 여기"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 그게 아니었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막막했다. 어떻게 쉰 살먹은 사람이 서서 영화를 본단 말인가. 그런데 플라스틱 간이 의자가 한쪽 구석에 수북히 쌓여 있었던가. 우리는 관람석 통로에 간이 의자를 놓고 자리를 잡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본 영화보기전에 나는 늘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예고편 안해 주면 그냥 가불자." 아, 예고편 없는 극장을 난 상상하지 않는다. 예고편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다음 프로의 액기스만 뽑은 장면들이 아니가. 그 재미가 없다면 극장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근데 그 날은 두편이나 예고편을 하지 않는가. 나는 신이 났다. 예고편을 두 개나 하는데 어찌 신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