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 미술사
붓으로써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던 화가
광인 최북
이철량 한국화가, 전북대 교수(2003-09-19 09:44:09)
세상 사람들이 주객(酒客)이라 하거나 화사(畵史)라고 부르기를 즐겨 하였으며 특히 심한 경우에는 광생(狂生)이라고 칭하였던 최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화가들 중에서 유별난 성품을 지녔고 작품도 많이 남겼던 인물이었다.
그의 초기의 이름은 직(直)이라 하였으나 후에 북(北)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자(字)나 호(號)를 여럿 사용하였으나 그중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생긴 글자모양을 본뜬 칠칠(七七)이라는 자를 많이 썼고, 붓으로써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으로 호생관(互生館)이라는 호를 가장 즐겨 사용하였다. 세상에는 그의 출생과 가계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당시에도 그는 일정한 거처를 특별히 마련하지 않고 방랑하며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려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알려진 바로는 무주인으로 기록이 전하기는 하나 무주 출생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무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그림을 익혀 타고난 성격대로 떠돌이 생활을 즐기며 자유분방한 생을 보냈을 가능성은 짐작할 만하다. 삼면을 그렇게 보내다가 49세에 여느 여관(旅館)방에서 객사를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한속에 머무를 수 없는 분방한 성격과 호탕한 기질을 알려주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그는 술을 즐겨마셨다. 혹자가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가져오는 돈은 받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나 좋은 술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는 거절하는 적이 드물었고 시중의 아이들이 술을 팔러 들고 오면 글씨나 지폐를 긁어모아 술을 사기를 즐겨 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양반 출신이 그에게 그림을 청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내키지 않은 청을 받아 놓은 최북은 그림그리기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림을 기다리다 지친 양반은 그를 찾아가 노발대발하며 죽여 버리겠다고 화를 내었다. 그러자 최북은 "그렇다면 네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나를 죽이겠다. 하며 옆에 있던 붓을 들어 한쪽 눈을 찔러 실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반쪽짜리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의 괴팍스런 성격을 당할 자가 없었다. 한번은 금강산에 여행을 갔었는데 경치가 일품이었던 구룡연에 이르러 즐기며 몹시 취하였다. 그는 때로는 울다가 때로는 웃다가 하며 큰소리로 "천하의 명인 최북,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리라"하고 외치며 폭포에 뛰어 들었다. 다행히 급히 구하는 사람이 있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한다.
그가 화가로서의 명성이 크게 나자 많은 사람들이 비단을 들고 와 그의 그림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는 산수화를 얻고자 하면 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어오면 "종이 이외에는 모두 물이로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괴팍하고 거칠은 성격 속에서도 그림 안에서만큼은 철저한 지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이 잘 그려져 좋은 그림인데 돈을 적게 주면 화를 내며 그림을 찢어버렸고, 변변찮은 그림에 많은 돈을 주면 껄껄 웃으며 그 사람의 등을 치고 돌아서면서 "저자는 그림값을 알지 못한다."고 핀잔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의 평소 성품대로 거칠고 활달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소심하고 무기력한 그림도 보인다. 또한 금강산을 사생한 작품도 남아있어 그의 화풍은 매우 다양한 편이다. 그리고 그는 특히 중국 원(元)나라 말기의 남종화풍의 대가였던 황공망(黃公望)을 매우 좋아하였다 한다. 이는 최북이 특히 남종화풍을 즐겨 그렸으며 그러한 남종화의 정신과 방법을 바탕으로 그의 나름의 화풍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읽게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두 작품도 그러한 예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는 「조어산수(釣魚山水)」는 그가 얼마나 깊이 남종화풍에 들어와 있는가를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그의 거칠고 활발한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있는 작품이다. 남종화가들이 흔히 즐겨 다루었던 고요하고 적막한 서정이 깃든 풍경에 홀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그림의 짜임새 역시 전통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최북이 얼마나 득의만만해서 그려낸 그림인지를 보여주는 대단히 사의성(寫意性)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전경, 풍경, 후경을 왼편으로 일직선으로 밀어붙이고 시원스럽게 트여진 오른편 공간에 인물을 그려넣었다. 홀로 서있는 정자와 한 그루의 버드나무 그리고 혼자 낚시에 빠져있는 어부는 함께 어울려 매우 고요한 맛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보이는 그의 필치는 대단히 거칠고 난폭하게 움직이고 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암벽의 윤곽선,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리듯 긁어내린 바위와 언덕의 필치, 버드나무 가지의 재빠른 붓놀림 등등 어느 한군데도 호흡이 멈추지 않고 순간적으로 그려낸 듯 막힘이 없는 표현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표훈사라는 글씨가 들어있어 그가 금강산 표훈사를 사생하였음을 보여주는 「금강산 표훈도」는 특히 18세기 무렵 조선의 화가들이 금강산 등의 실제 풍경을 얼마나 깊이 관찰하고 자연의 묘미를 터득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남종화풍을 토대로 하여 자기표현을 끌어내었던 면에서는 앞선 "조어산수"와 같은 내용이나 두 그림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 표훈사도는 표훈사의 실제적 정경을 바탕으로 하여 매우 현실감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수직준과 잔잔한 미점(米點)그리고 담백한 담채의 효과로 이상적인 산수화의 감각을 훌륭히 담아내고 있다.
앞산 언덕에서 표훈사를 내려다 본 듯이 그려졌으나 화면의 시각은 평원법(평평한 지면을 멀리 바라다보는 기법)을 구사하여 표훈사의 뜰과 수평으로 가로지른 다리를 중심으로 한 넓직한 냇물 등이 광활하게 펼쳐져 보인다.
또한 실제로 매우 높게 보였을 것으로 보이는 윤곽선으로 하얗게 단순 처리된 뒷부분의 암산은 매우 낮게 표현되어져 평원산수에서 특징으로 나타나는 시원한 공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털 빠진 몽당붓으로(독필법이라 함) 그려진 듯한 산과 바위의 윤곽선의 갈필 효과와 마치 수채화를 연상시킬만한 청 빛의 유연한 담채처리 그리고 성글성글 하면서 깔깔하게 찍어 내린 미점들이 금강산의 늦가을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이 보인다. 특히 화면 중심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들이 잎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계절감각이 두드러진다.
언덕을 타고 소나무들의 표현이 겸제 정선의 필치를 연상시키고 있어 18세기 화단에 겸제 화풍의 영향을 짐작케 하며 붓을 옆으로 하며 툭툭 찍어 내린 미점법은 중국 남종 화풍의 유입 이래로 흔히 나타나는 표현기법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부분적으로 선배화가의 화풍들이 최북 자신 안에서 농밀하게 소화되고 있으며 앞서 언급되었듯이 실제 자연 풍경을 회화의 정신세계로 이끌어낸 작가의 역량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렇듯이 한국의 실제 자연을 직접 보고 그려 독특한 회화의 정신세계를 이끌어낸 한국화풍이 18세기에 이루어 졌으나 그 후 더욱 많은 발전을 이루어 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