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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 | 특집 [전북의 인물,전북의 역사 ⑭]
조국위해 투신한 불꽃같은 삶
구파 백정기 의사
조광환(학산정보산업고등학교 교사)(2015-06-05 17:41:55)


 고통의 새벽 희망의 불씨로 태어나

 구파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일제가 동학농민군을 압살하고 거칠 것 없이 경복궁에 불법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행하는 만행과 더불어 침략을 노골화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이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처럼 한반도 전역을 할퀴던 상처투성이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 39세 짧은 삶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불꽃처럼 태우다 가신 진정한 애국열사라 할 수 있다.

 수원 백씨인 선생은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1907년 8월25일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편모슬하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틈틈이 한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동서 정치경제사상에 심취하면서 당시 일제의 침략아래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과 세계자본주의적 침략을 저주하는 저항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피끓는 조선청년의 열정을 담아

 1919년 2월 24세의 열혈청년으로 성장한 선생은 서울로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곳곳에 뿌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강탈한 것도 청일, 러일전쟁에서 피를 흘린 댓가를 힘없고 양순한 조선민족을 흉기를 위협하여 상환 받으려는 무자비하고 간교한 책동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무력으로 강탈다한 조국을 되찾는데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무력항일투쟁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무력항일투쟁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전주의 김동수와 손을 잡고 당시 백산에 와꺄야마라는 일본지주를 찾아가 김동수를 등기소 직원으로 거짓소개하고 서류상으로 만든 토지를 와까야마로 하여금 사게 하였다. 땅을 넓히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와까야마는 헐값으로 팔겠다는 선생의 말에 의심 없이 사들였고 선생은 거액의 돈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1919년 8월 동지 4인과 더불어 서울, 인천 등지의 일본기관 파괴를 계획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부득이 중국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다음해 경우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활동하던 중 1920년 봄에 경성 본정경찰서에 구금 당하였으나 이름을 바꾸고 광부로 위장하고 있었던 관계로 본적과 행적을 속여 위기를 모면하고 경향각지를 숨어 다니다가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국내외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2월 구국운동의 중심인 봉천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부득이 북경으로 떠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3년 여름, 선생은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발전소 공사장에 은신하여 일본천황의 암살과 기관 등을 파괴하려고 준비하던 차에 불의의 동경대지진으로 동지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다음해 4월, 다시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위하여

 1924년 6월, 직접행동을 주장하는 정열의 선생은 독립운도의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당시 사회를 풍미하던 세계적 혁명풍조에 우리의 민족진영이 분열되어 공동의 적인 일제의 타도를 망각한 듯 하자 겨레의 앞날을 고심하던 끝에 자유연합주의에 의한 무정부주의 이론(정부, 사회, 종교 등의 일체의 권력과 권위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완전한 자유를 획들하려는 사상)을 연구하여 조국해방에 이바지하고자 결심한 것 같다. 이점에 대해서는 신채호 선생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신채호 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을 쓰고, 선생은 몸소 적의 기관파괴 등 일제타도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이 두분 모두 적의 옥중에서 순국한 것은 행동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을 실천한 본보기였다. 마침내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 동지와 주간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여 단재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의 홍보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11월, 선생은 다시 노동운동을 전개코자 상해에서 경영하는 영국 철공장 직공이 되어 노동조합을 조기하는 한편, 중국동지 노검파와 대만동지 범본량 등의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또 중국동지 육불여, 모일파 등이 주재하던 상해공단연합회를 적극 강화하던 차에 1923년 5월 30일 영일 양국 자본가를 상대로 유명한 상해 총파업사건이 일어나자 12만 노동자를 동원하는데 중추적 역할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가을에 남겨으 상해 등지의 한·중 양국 동지들을 규합하여 복건성 천주에 가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 라는 농민자위대를 조직하여 3500명의 대오를 정비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동남아 제국가 대표로 구성된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일본, 중국, 인도, 안맘, 대만 등 각국대표 1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국제회의였다. 이 대회와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만의 북경회의등을 통해 결의 사항은, 무정부주의 선전기관지를 발행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 테러 행위에 사용할 폭탄 제조소를 설치하는 것 등이었다. 또 폭탄제조소에는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기로 하는 등 구체적인 안까지도 계획하였다. 이 대회에 선생은 조선대표로 참석하시고 동연맹기관지 "동방"의 편집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이라는 명제아래 이처럼 노동자, 농민, 내외국인 동지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조직화하고 행동하는 혁명가였던 것이다.


63정 거사

 1930년 10월 당시 북만해임지구를 기반으로 김좌진, 이을규를 비롯하여 해방전 대일, 대공 투쟁에서 순절한 김시야, 김야운, 이준근, 엄형순 등 동지와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조선교포의 조직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였다.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무정부주의자연맹이 중심이 되어 구국투쟁을 목적으로 항일연맹라는 무장행동단을 조직하여 천진에 잠입하여 일본군수송선 1만 5천급을 일청기선부두에서 폭파시키고 일본군 병영 및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적의 간듬을 서늘케 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생해 홍구에 있는 63정이란 일본 요정에서 중국대륙을 집어 삼키려는 술팩의 밀명을 띤 주중일본대사 유길명이 일본 정객과 중국 국민당내에 기생하고 있는 친일객과 중국 국민당내에 기생하고 있는 친일 중국 인사 100여명을 초대하여 침략 밀회를 한다는 소식을 사전에 입수하여 정화암과 습격 계획을 구상하고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그 해 17일 오후 9시에 기해 일격에 폭탄으로 침략의 수괴들을 제거코자하던 찰나에 일보군의 역습을 받아 불행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압송되어 일본 장긱법원에서 15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 중 평소의 지병인 폐의 고질이 재발되어 1934년 6월 5일 (陰 4월 23일) 오후 11시에 장기형무소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하시니 그때가 39세였다.


민족해방의 3의사

 육삼정거사의 일화 한토막. 거사 전날 밤 선생은 동지인 이강훈, 정화암, 원심창 등 8명의 여러 동지와 더불어 누가 폭탄을 투척하는 주행동자가 도리 것이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죽음을 자청하며 나서, 다투다 못해 제비뽑기로써 선생이 결정되어 거사에 임하였다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골이 서늘한 아름다운 조국애와 살신성인의 독립정신을 느낀다.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1월 6일 일본에서 유해를 봉환 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는데 그때의 상황을 백범 김구성생은 "나는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 날 미국인 군정 간부도 전부 회장(장사 지내는데 참례함)하였으며, 미국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도하는 비곡(애조를 띤 음곡)을 이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분 의사의 영여(유골을 모신 상여)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임금의 장례)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1953년 10월 30일에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구파 백정기의사순국기념비(구파백정기순국기념비)를 세우고 1962년 3월 1일을 기해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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