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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4 | 칼럼·시평 [문화칼럼]
모래시계와 정리해고
윤찬영 (전주대 교수·사회복지학과) (2015-06-11 15:41:50)


 "나, 지금 떨고 있냐?"

TV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태수가 마직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다. 예정된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함을 지키고자 했던 청년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태수는 끝까지 자기가 믿었던 친구인 검사 우석의 손에 의해 사형이 구형될 수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속의 강렬한 이상기류를 느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같은 드라마를 3년만에 다시 보았는데 여전히 같은 느낌이었다.

 이 드라마가 처음 방영되고 나서 얼마 후 묘하게도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모래시계가 재방영되었다. 이윽고 안기부의 북풍공작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드라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히려 나의 뇌리에는 태수의 죽음과 정리해고가 하나의 묶음처럼 맴돌았다. 왜…?

 요즘 직장인들 사이의 유행어가 "나, 지금 떨고 있냐?"라고 한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절박한 심정을 빗댄 말일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실업이란 일종의 경제적 사형선고이다. 그런데 그것은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한 인간과 가정을 황폐화시키는 것으로서 사형보다 무서운 것이다. 비록 생존을 위해 강요된 노종이었지만 그 속에는 인간관계가 있었고 또한 소박한 자기성장의 꿈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을 정지당한다면 과연 태연할 수 있을까?

 해고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미국에서도 해고된 사람들의 급박한 경제적 문제가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인간 존재로서의 실존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법적인 사형은 죽는 사람의 순간적 고통으로 끝나고 유가족들의 상처가 남게 되지만, 경제적인 사형은 당사자와 모든 가족들을 형기없는 비인간화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 채로 지옥에 가두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또한 드라마 속에서 태수가 우석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 해고당한 것이 현실에선 전혀 가능할 리 없다. 결국 억울함과 무기력감만을 안은 채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 동안 온갖 비리를 저질러 오면서 군림하였던 재벌은 여전히 천문학 숫자에 이르는 개인 자산을 움켜쥐고 있는데, 평생을 몸바친 직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소위 철가방으로 불리우는 교수들에게도 오늘날의 상황은 매우 불안한 것이다. 필자는 이미 7년 전에 재임용 탈락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총장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가 때마침 재임용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탈락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재임용이 관철되기는 하였지만 그 때 약 한 달 간의 씨름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종종 신문에 보도되는 교수들의 재임용 탈락 사건을 접할 때마다 그 당시 느꼈던 증상들이 되살아나곤 하였다. 우선 뱃속이 뜨거워지면서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곧 폭발할 것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 물론 소화도 안 된다. 입술과 손이 떨린다. 겁이 나서가 아니라 너무 분해서 말이다. 가족들은 말도 못하고 끙끙거린다. 혐오의 대상으로부터 자존심상 도저히 받앋ㄹ일 수 없는 이유로 재임용 탈락을 당해보니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 실직을 당하게 되면,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기도 하지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려는 강한 정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정신적·정서적 상태가 유지되다가 드디어 경제적으로 파산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 극동의 심연으로 전락하게 된다. 최근 자살이 늘어나고, 서울역 앞 지하도에 넥타이를 맨 노숙자가 증가하고, 생필품 구입을 위해 좀도둑이 되는 사건들이 줄지어 보도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다고 할 때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도 엄청난 문제이지만 당사자 개인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사회복지계·노동계·시민운동계에서 사회보장의 확충과 사회복지예산의 증대를 끊임없이 주장해 왔으나 번번이 경제지상주의자 내지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외면당해왔다. 필자 역시 시민운동을 하면서 곳곳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 왔으나 정부·국회·기업·보수언론 등에서의 반응은 참으로 역겨웠다. 동정어린 반응을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 예산타령, 복지병 등을 내세워 냉정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해고된 노동자를 예로 들어 보자. 고용보험법상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실직자의 1~2% 밖에 되지 않으며, 그것도 최고 120일 이내의 기간 동안 통상임금의 50%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 재취업이 되지 않으면 그 때부터는 아무런 대책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시행되는 실업부조나 실업수당제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빈민들에게 제공되는 생활보호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 당국은 사회보장의 확충을 주저한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IMF에서 긴축재정과 고금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같이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사회보장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 사회복지를 반대해 왔다. 호경기일 때에는 누구나 잘 먹고 산다는 이유로, 불경기일 때에는 누구나 잘 먹고 산다는 이유로, 불경기일 때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시장은 이미 19세기부터 실패하였다. 시장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 역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지국가처럼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한 국가개입이 아니라 자본과 기득권층을 위한 국가의 가부장적 보호가 오늘날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시장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어 본다. 대통령의 취임 일성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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