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문화저널]
판소리명창
대쪽같은 추임새, 대쪽같은 예인
명고수 이정업 4
최동현 군산대 교수, 판소리 연구가(2003-09-19 09:47:09)
이제 이정업의 두 번째 평가인 추임새에 관하여 알아보자.
그동안 판소리에서 추임새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실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추임새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판소리의 현장 예술적 총체성을 중시하려는 일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추임새에 대한 학문적 검토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추임새는 단순히 흥을 돋구어주는 조흥구(助興句)가 아니라,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의 하나로 보고, 이를 판을 이룬 소리판에서의 상호 작용의 현상으로 해석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추임새는 판소리의 본질적 현상의 하나로 절대로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추임새를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추임새를 잘 구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송영주 같은 이는 고수의 구비 요건을 말하는 가운데 자세·북가락과 함께 추임새를 들고, 북가락은 추임새로 메꿀수 있다고 하여, 추임새를 제일 중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정이 이쯤 되면 추임새를 잘하지 못하는 고수는 명고수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사실 요즈음에 와서, 특히 무형문화재였던 세 사람의 고수가 타계한 뒤 이만하면 됐다고 내세울만한 고수가 선뜻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대체로 요즈음의 고수들이 추임새에서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북가락은 앞의 세 사람(김명환, 김득수, 김동준)에게 크게 뒤지지 않지만, 아무래도 추임새만은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이정업은 특히 추임새를 잘 했다고 한다. 적재적소에 적절한 성음의 추임새를 넣어 소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장시간의 공연으로 지친 소리꾼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은 이정업과 함께 공연을 해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특히 이정업의 추임새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날카로운 음색이다. 이에 대하여 배기봉은‘대쪽같은 추임새’라 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박동진 또한 소리꾼의 음정을 같이 따라가는 이정업의 추임새는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정업은 북을 치면서 슬픈 대목에 이르면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이정업에 대해 증언을 해준 모든 사람들이 이정업의 이 점을 인상 깊게 얘기했다. 특히 이정업이 죽기 보름 쯤 전인 1974년 3월 5일 열렸던 오정숙의「수궁가」발표회 때는 처음부터 눈물을 너무 흘려 고수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오정숙의「수궁가」발표회는 그의 스승인 김연수가 운명한 날 열려서, 혹시 공연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한 주위 사람들이, 소리하는 오정숙에게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공연을 보고 있었다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이 없던 때도 그는 눈물을 잘 흘렸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은 북을 치지 못하고 내려온 이정업은, 나도 이제는 죽을란가 보다고 하더니, 그로부터 보름쯤 후에 참말로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이정업이 북을 치며 눈물을 잘 흘렸다는 것은 그가 참으로 다정다감한 예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남보다 훨씬 섬세한 감성을 지녔기에, 그리고 남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기에 그랬을 것이다. 눈물 많은 흥보가 누구보다도 착한 사람이었듯이 이정업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리라. 그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를 일러‘법 없이도 살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눈물이 많았을 것이다.
이정업의 다정다감함은 우리의 전통 예인들의 삶을 생각나게 한다. 어려서 예인의 길에 들어 한평생 빛나지 않은 그 길을 간사람, 중간에 사고를 당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길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 굿판을 마다하지 않고 해금을 들고 달려가던 사람, 천대 받던 일을 고집하여 끝까지 완성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다정다감함을 이정업은 지니고 있었다.
이정업이 저 세상으로 간지도 벌써 스무 해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정업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의 생전의 업적에 걸맞은 명예를 돌려줌으로써, 그의 한결같았던 삶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