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 터에 펄럭이는 깃발, 진안 산등성이의 구부러진 논, 운암 막은댐, 초가집 굴뚝위로 피어나는 연기. 이제는 추억 저편으로 묻혀버린 고향의 기억들을 흑백사진으로 차곡차곡 기록해 온 이가 있다. 지난 40년동안 전원을 주제로 사진활동을 해온 '전원일기' 사진작가 김학수(66)씨가 바로 주인공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가 담아온 농촌풍경은 과거에 존재했던 시골의 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이 자라고 살아온 농촌의 살아있는 기록, 생생한 역사로 살아난다. 5.16 이후 농촌풍경이 바뀌고 기계화되면서 그가 찍어온 60년대, 70년대, 80년대 말까지의 농촌풍경은 말 그대로 농촌변천과정을 나타내는 역사가 되어 영원하 기록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빽빽이 들어찬 고층건물과 아스팔트만이 뒤덮인 전주근교의 과거 풍경은 이제 그의 사진에서나 찾을 수 있다.
"어릴 적 내 고향집엔 장독대가 있고, 감나무가 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그런 추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도시의 삭막함과 속도감에 취해 여유를 찾지 못할 때 그의 농촌풍경은 우리를 긴 시간여행으로 인도한다.
김학수씨는 33년 전주 평화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높은 건물이 들어차 있는 그곳이 40년동안 농촌풍경을 찍게 한 어릴 적 기억이 담겨있는 곳이라고 한다. 20대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한때 '먹고사는 것'을 위해 칼라현상소 등을 운영했으나 사진이 좋고 농촌풍경이 좋아 자리를 자주 비우는 가운데 장사는 어림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 60년대 동아국제 사진전 입선을 비롯, 문공부 주최 신인 예술상, 국전 입선, 한국사협회 10걸상을 2회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며, 농촌풍경의 역사가이듯 전북도전 1회 때부터 심사위원,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전북사진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시멘트 문화와 삭막한 삶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잊고 산다"고 말하는 그는 "그들에게 농촌의 풍경을 전달하면 뭔가 도움이 될까해서" 전라북도 곳곳을 누볐다고 한다. 전주 근교에서부터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지를 찾아 헤매기를 수십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추억이 담긴 장면은 찾기가 더욱 힘들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촬영대상은 김제 만경 평야처럼 경지정리가 된 곳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 한구석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추억을 담아 낼 수 있는 오지 농촌이라고 말한다. 아침 안개 속에 가려진 농촌 풍경과 저녁노을에 휩싸이는 들녘의 차이점을 담아내기 위해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기도 했지만 정작 맘에 드는 사진은 1년에 1-2장 정도에 불구하고 꼭 남기고 싶은 사진도 100여점이 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한다.
김학수씨가 아끼는 작품은 모두 흑백사진이다. 마치 수채화처럼 또는 판화처럼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바로 재현작업(암시작업)을 중요시하는 그의 노력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암실에서 내가 표출하고 싶은 느낌을 얼마든지 살아나게 할 수 있죠. 내가 원하는 톤으로 빛을 조절하여 나만의 고향을 표출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그는 40년간 흑백사진만을 찍어 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에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농촌풍경의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다 어느 순간 또 다른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설명하는 대상은 바로 '누드'.
'전원일기' 작가로만 알려진 그는89년과 95년 두 차례의 누드전시회를 열기도 한 누드부문 중견작가이기도 하다. 자연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조화시킨 후 다시 생활 속에서 존재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왔던 그는 이제 또 다른 누드의 영역을 개척하려 한다.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현대 락 음악과 접목을 시도하듯이 한국의 전통적인 '한'과 여인의 현대적 아름다움을 접목시켜보고 싶습니다."
나이 예순 여섯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시도는 누구 못지 않게 강렬해 보인다. 그러나 40년간 담아오던 농촌풍경은 그가 추구해 나가는 영원한 주제다. 그는 영원한 '전원일기' 작가인 것이다.
오늘도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만의 고향 찾기를 넘어, 삭막한 도시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추억을 찾아 떠나려고 한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고향을 영원히 간직하는 고향 지킴이로서 새로운 전원일기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