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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4 | 칼럼·시평 [문화시평]
사람과 사람사이의 아름다운 간격
극단 갯터 <아름다운 거리>
김민수 (군산대 교수·국문과)(2015-06-19 16:18:34)


 가난의 깨끗함에 대하여

  연극평이란 공연의 성패 여부를 판단하는 작업이다. 흥행에는 성공하였지만 별로 신통치 못한 작품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혹 연극 대중들이 모르고 있는 사항이 있으면 이를 예리하게 끄집어내어 대중들의 연극 이해를 돕는 것이 연극평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론은 연극인과 관객의 저변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에만 해당된다. 배우들과 스탭들만 열심히 공연에 매달리고 있고, 관객석에는 초대 관객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는 지방 연극의 현주소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갯터소극장의 이번 공연도 마찬가지. 필자는 군산에 거주한 지 꽤 되었지만, 처음으로 갯터소극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변명삼아 말하자면, 초라한 객석을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아름다운 거리> 보고 연극평을 써보라는 문화저널의 원고 주문으로 엉거주춤 객석에 앉았지만, 공허감은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뒷 자리의 한 노인 신발을 벗고 자꾸 발을 뻗는 바람에 신경이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래도 연극은 역시 연극이고, 한 시간 40분의 불편한 자리는 마치 예배소의 불편한 자리가 한 남루한 영혼을 위로해주듯,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사실 요즘의 사실주의 연극이 대체로 그러하듯, 뒷부분의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빨리 끝났으면 하는 지루함이 연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극은 오히려 뒷부분에 힘이 실려 오랜만에 연극적 감동을 주었다. 민두상 역을 맡은 강동곤의 대사와 표정 처리는 선명했고, 안광남 역의 곽인영은 행위를 배우답게 표현하는 연기술에 능숙했다.

 고이랑 역의 한유경은 비음이 섞인 저음의 육성을 구사하여, 세파를 잠재우고 마침내 잠잠한 중년에 이른 한 여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두 남자의 동거 생활이라는 구질구질한 소재를 구질구질하게 다루지 않고, 반듯하게 양식화해낸 정연호 연출가의 솜씨도 열정의 이름을 빌려 마구 남발되기 마련인 치기를 도려내는 데 큰 몫을 한 것 같다.

 이번 공연은 공연 자체로서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였다. 우선 작품 선정자체가 IMF 사태라는 시대적 환경에 적합했다. 대체적으로 이만희의 희곡은 작지만 정감있는 목소리로 주제를 전달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음 어둠이었습니다> 이후 이만희는 늘 스케일은 작지만, 특새있게 한국적인 것의 핵심을 잘 묘파한 작품으로 일관해왔는데, 이번의 <아름다운 거리>도 이러한 특색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남루한 일상 속에서 작은 보석처럼 빛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진부한 수필 나부랑이의 주제나 될 수 있지 실제 생활에 있을까 싶지만, 이만희 용케도 그런 보석을 만들 줄아는 재능을 지녔다. 이번 작품에도 이런 보석 이야기가 조금은 담겨 있었다.

 그로토프스키는 '가난한 연극'의 이념을 내세웠다. 가난한 지방 극단, 갑자기 가난해진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소설가 모라비아는 한국을 일컬어 '가난의 깨끗함이 남아 있는 나라' 라 칭했다 한다. '가난의 깨끗함'을 찾기 위해서 한 시간 40분만 갯터소극장에 맡겨 놓고 기다릴 수 있다면! 이만희의 희곡, 갯터 소극장 배우들의 열연이 온갖 '가난의 보석' 만들기에 집중해 있으므로.


거리감이 주는 아름다움

 남년 셋이 있다. 조금 거친 듯하지만 나름의 순정이 있는 사내 안광남, 자존심 하나로 힘든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온 또 다른 사내 민두상, 안광남과 이혼하였으나 사랑의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있는 여성 고이랑, 이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랑과 갈등의 이야기가 갯터 소극장에서 무대에 올랐다.

 <아름다운 거리(距離)>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간격을 다루고 있다. 거리감이 아름답다니? 얼핏 보면 이 표현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표현 속애는 작가 이만희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칼릴 지브란의 경구처럼, 사랑이란 마주 두 선 두 그루의 나무와 같아야 한다는 것. 너무 가까이 선 나무는 상대에게 짙은 그늘을 드리워 결국 상대를 고사시켜 버리고, 너무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나무는 서로를 그만 잊고 만다는 게 칼릴 지브란의 성찰이었던 것. 누구에게나 자존심이 있는 법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는 말과도 짝을 이룬다. 아무리 세상 살이가 어려워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은 이들 세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조용히 다가온다.

 그러나 조용한 사랑 이야기가 반드기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이만희의 희곡을 여러 차례 접했는데, 이제 거의 작가 의식의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은 느낌이 든다. 가난하더라도 신심을 잃지 말고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은 매우 아껴 말해야 할 교훈이다. 이런 교훈을 남발하다 보면, 부도덕한 정치꾼이나 기업인들이 외치는 '노동자들만의 고통 분담론(전담론?)과 하등 다를 바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과 정직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안전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학교나 교회나 언론에 맡겨도 충분하다. 그들이 이 정도는 다 도맡을 수 있으므로, 연극은, 위험한 연극으로 존재해야 한다.


김민수/ 1960년생. 서울대 국문과,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희곡을 전공했다. 95년부터 군산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북지역의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평론가이다. 주요저서로는『문학의 존재영역』,『한국 현대문학의 이해』,『희곡읽기 방법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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