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3 | [서평]
음울한 되새김질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1994. 김형경, 민예당)
정철성 편집위원, 전북대 영문과 강사(2003-09-19 09:54:25)
지난 팔십년대를 반추하는 소설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팔십년의 격동기에 이십대를 보냈던 젊은 작가들이 조각난 그들의 젊음을 어떤 형식으로든 다시 맞추어 보려고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 시대를 정리해보려는 시도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역시 우리가 가장 최근에 접히게 된 지난 시대의 되새김질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구운형, 진은혜, 김시현, 민형조 네 인물이 대학을 졸업한 6년 후의 한 해 동안 겪은 일들의 기록이다.
그들은 83학번으로 함께 성양화과에 입학하여 한때 운동의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87년에 졸업한 후 콩깍지에서 흩어진 그들은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마지막까지 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회민화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만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열세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소제목을 붙이고 있다. 소제목들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이다. 예를 들어 '슬픔도 자라면 꽃으로 피리' '골목이 꺾이는 곳마다 그대 만나리' '기억의 한 곳이 어두워진다' '하늘의 뿌리를 털며 눈이 내린다' 등이 있다. 그리고 소제목 아래 인물의 이름이 덧붙여지는데 구운형, 진은혜, 김시현, 민형조, 등의 이름이 순서대로 세 번 반복되고 마지막으로 구운형이 나온다. 연극의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삼막 사장에 사막 에필로그가 붙어있는 셈이다. 각각의 인물은 묘사의 중심일 뿐이지 서술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줄거리의 전개가 이들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갈 뿐 서술의 시점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확보하고 삼인칭으로 서술을 계속하기 때문에 각 부분은 마치 현장을 추적하는 카메라가 각 인물을 번갈아 따라가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이 반복하여 비취지기도 하지만 최민화의 죽음 이후 벽화, 구운형의 실명, 재판 등의 사건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긴장감이 풀어질 정도는 아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이른바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인식함으로써 발전을 이룬다. 여기서 정석에 맞는 인물은 구운형이다. 그는 두통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고, 민화가 자살할 때 형조가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의식에 의한 압박으로 실명에 빠지기도 하지만, 휴양원에서 만난 정인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열정을 허용치 않는다는 쓸쓸한 좌절 속에서 살아남았다.
진은혜는 자신을 겁탈한 사내와 결혼한다. 민형조는 자살방조죄로 복역한다. 냉소적인 명상가 김시현은 인도로 떠난다. 그들에게는 이제 묵묵히 살아야 할 긴 여생만이 남아 있는 거처럼 보인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연애감정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자면 구운형, 김시현, 민형조와 진흔혜, 최민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남녀를 섞어 셋을 뽑으면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애정은 민형조 식의 어투로 말하자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물 같은 것이다.
최민화의 자살은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자살의 동기는 분명치 않다. 그녀가 민형조에게 말한 대로 정말 암에 걸려 있었는지, 아니면 검사가 병원기록을 들추어 말한 대로 경증의 간경화와 2기 알콜중독이 맞는 것인지 독자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진은혜가 박선영을 통해 찾아낸 최민화의 일기 12월29일분은 간경화와 알콜 중독을 인정한다. 그러나 진은혜가 만난 의사는 정밀검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없다고 말한다. 그녀가 진은혜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추구, 다시 말해 꿈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것이라고 보기에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최민화의 일기에서, 그리고 그녀의 행적에서 죽음에 이르는 처절한 고뇌가 드러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서에 "내 선택을 패배나 절망이라고 생각지는 마. 단순한 충동도 아니야. 그저 내 삶이 여기까지라는 거야. 여기까지. 모든 것이 꿈만 같아. 이제 꿈을 깨려고 하니 알 것 같아. 나의 사랑은 지옥이고 나의 이상은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이라고 적었다. 평등을 꿈꾸었던 운동가 최민화가 삶의 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것이 민형조의 의식에 떠오른 상념처럼 살아남은 동무들에게 통과의례가 되어버린다면 그녀의 죽음에 그처럼 큰 의미를 부여 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팔십년대의 청년이 민족적 과제로 인식한 것을 요약하자면 민주화와 통일일 것이다. 그중 적어도 전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문민시대가 어떻게 운동권의 눈에 패배로 비치는가에 대하여 작가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 서른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세상이 한눈에 조감되고 인생의 길목에도 가로등 같은 것이 커져있을 것"이라는 민형조의 기대는 헛된 소망이다. 그런 기대의 허망함은 출소한 민형조가 구운형의 아이를 안고 깨닫는 내용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 이데올로기도, 신비주의도, 극단으로 가면 결국 현실이 있을 것이다. 아니, 일상이. 가도 가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말 뿐인 삶을, 어떻게 한다 해도 달라지지 않을 삶을 그토록 발버둥치며 고쳐보려 했다니, 인생에 있어 의미라는 건 없어, 의미를 찾는 과정, 그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지." 결국 그들은 일상의 포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독자가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무리이다. 소설이 도덕적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런 시도를 미리 삼갈 것이다. 그러나 성장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만나는 성격의 변화 또는 발전에 비추어 보면 네 명의 인물은 그런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성장 할 만큼 성장한 상태에서 예정된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이 소설의 맛은 오히려 감각적 문체에 있다. 때때로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작중 인물이 겪는 착잡한 경험들이 그들의 내면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를 묘사할 때 김형경의 필치는 살아난다. 인물들이 어긋난 애정을 서로 감추고 줄다리기를 하는 장면들에서 그것이 줄거리를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하는 것은 어설픈 감상에 바지지 않는 묘사가 거리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내면묘사에 치중하는 가운데 현실의 묘사에서는 그것이 현실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네 인물 사이의 갈등은 그들이 과거를 공유했다는 이유로 해소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까지도 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허용된다. 이런 인간관계는 바람직하다거나, 그렇지 못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관계이다. 최민화의 일기에서 그녀는 남산의 송충이들이 구월에 나무에서 내려와 알을 낳으러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또 그녀의 손에 잡힌 잠자리는 손바닥에 알을 낳는다. 송충이가 나방이 되기 전에 또는 잠자리가 물 밖의 어디에 알을 낳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말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