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요란스레 떠들어도 드러난 실속은 없다
윤덕향(2003-09-23 10:01:06)
매화 향기와 산수유 노란 꽃망울로 찾아든 봄은 예와 다름이 없다. 우루과이 라운드나 슈퍼 301조와 같은 찬바람 속에서도 들판마다 어김없이 농투사니의 농사준비가 한창이다. 때로 삽자루 쥔 손을 놓고 먼 산 바라보며 한숨을 쉬어보지만 농사는 농사인 걸, 화풀이 하듯 땅을 뒤적일 밖에. 농촌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처럼 요란스럽던 이런저런 말잔치 한바탕도 이제 국회비준 때나 다시 한번 구경할 수 있을 것인지 잔치 끝난 뒤의 적막이 들판을 메꾸고 있다. 높은 분들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은 것이지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배운 도둑질이라고 그저 땅이나 파야한다. 하기야 금년은 일찌감치 개구리 잡아먹은 분들 덕에 개구리 울음 없이 조용한 여름밤이 될 법도 하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각종 사고와 사건이 언론마다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심각한 것이면서도 뒤이은 사고나 사건에 가려 쉽게도 어물어물 망각 속으로 사가지고 있다. 수입개방으로 인한 이런저런 논란을 잠재우듯 뒤이어 터진 사건들은 이 정부의 난처함 입장을 하늘이 알아서 도와주는 것만 같다. 공군참모총장이 탄 -배나 자동차가 아닌- 헬리콥터가 추락한 일도 심심하지 않은데 곧 서울시내 지하통신망 화재로 인하여 묻히고 말았다. 육해공에서 모두 사고가 있었으니 다음은 지하라는 농담을 확인해 주듯 일어난 화재사건도 상문고 비리사건 덕분에 뒷전으로 물러앉았다. 이 교육 비리 사건은 또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의하여 어물어물 넘어갈 것인지 걱정 아닌 걱정이다.
그런 한편으로 끊임없이 북한의 핵문제와 남북회담이 등장하고 있다. 대형 사건 사고의 와중에서 끊임없이 언론에 등장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신기로울 지경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갈피와 두서를 잡을 수 없게끔 왔다 갔다 하건 것이 급기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인지 공갈인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 거슬러갈 것도 없이 5공이나 6공 시절이면 초비상이 걸렸을 법하지만 문민정부라서인지 의연하기만 하다. 내심으로야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도무지 주변에서 긴장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다. 전쟁에 대비하여 사재기를 하는 일도 없고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달러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보도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사재기를 마친 탓인지 도무지 아무런 기미가 없다. 국민들의 의식이 그만큼 성숙된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믿고 싶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암울했던 3,4공 시절은 그렇다 치고 5,6공을 거치면서 얼마나 여러 차례 북괴집단의 위험이 있었는가를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다. 늑대가 온다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는 단지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얘기만이 아니다. 정권의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전가의 보도처럼 북괴집단의 망동운운 하다보니 무감각해진 국민들의 안보의지는 국민의 탓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처럼 만든 것이 누구인가를 생각할 일이다. 그리고 6공의 뒤를 이은 문민정부에서 책임질 일이다. 아무리 6공과의 차별화를 내세우더라도 같은 뿌리에 기반을 두고 생성된 현 정부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안보를 정권 유지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첨병역을 담당한 분이 집권여당의 얼굴로 있는 판에 가면을 쓴다고 하여 벗어날 일이 아니다.
통일정책 수립과 대북한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하여 통일원 장관의 위상을 높여 부총리로 하였을 때, 그리고 그 초대 부총리에 진보성향의 인사가 들어앉았을 때 기대에 차 바라보던 눈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저런 사건들 속에 훈령조작사건은 유야무야 결과를 알 수 가 없고 새롭게 부총리가 들어섰다. 통일 정책이나 대북한 정책이 부총리 한사람에 의하여 좌우되지는 않겠지만 석연하지 못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안보의식이 해이해진 것이 오로지 군사독재 정권의 메카시즘 선전활동의 결과만은 아니다. 개혁을 표방하고 들어선 이 정부에도 얼마간의 책임은 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대북한 정책과 통일정책은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동구 공산정권의 붕괴로 염원이자 숙원인 남북통일을 눈앞에 둔 것처럼 즐거워하던 국민을 다시 무관심의 영역으로 몰고 가려 한다. 더구나 미국과 북한과의 사이에서 이 정부가 보여준 외교적 방황은 무력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때마추어 등장한 우루과이 협상과 더불어 이 같은 외교적 방황은 한동안 반미구호가 사라졌던 대학가에 반미수호와 대자보를 범람하게 하고 있다. 대학가의 대자보나 구호처럼 우리는 경제와 국방, 외교에서 미국에 철저히 종속된 국가란 말인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다. 국민과의 밀월기간도 이미 끝나고 서서히 권태와 염증이 밀려들 법도 하다. 개혁이라는 구호와 위대한 대통령, 양심적이고 근엄하신 대통령의 이미지로 언제까지 국민 앞에 버티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구석구석 들추고 털어서 실감할 수 있는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요란스레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도 실감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엄청난 성과를 얻은 것처럼 선전해댔지만 드러난 실속은 쌀개방 외에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판에 곧이곧대로 선전을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다 보면 바른 말도 바로 들리지 않는 법이다. 선전과 언론매체에 의한 여론 조작으로 정치를 하던 시기는 끝났다. 농부들이 한숨을 거두고 삽자루를 쥐며 한숨으로 채우던 주부들의 장바구니가 반찬거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치가 정치다울 때 국력에 기반을 둔 국가 안보도 튼실해질 거시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판에 한편에서는 1년도 넘게 남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 선거운동을 한다는 말도 들린다. 한동안 주춤하던 호화유흥업소에 활기가 돌고 야간심야 영업도 해제되리라 한다.
수돗물 대신 생수를 사먹어야되는 것을 이 정부의 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을 들어 6공과 차별화되는 문민정부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