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5.10 | 특집 [저널의 눈]
익산 원서점과 정읍 서울서점 헌책방을 넘어선 귀한 그 곳
헌 책방 이야기③
최정학(2015-10-15 13:49:58)

 

 

 

학창시절, 동네에 헌책방이 있었다. 일 년에 딱 두 번뿐이었지만, 몇 해를 이용했으니 단골이라면 단골일 수도 있었겠다.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학기 초마다 호기롭게 산 참고서를 처음 그대로 가져가던 곳이었다. "이것밖에 안 쳐주냐"투정이라도 한번 부릴라치면 "안 팔 거면 그냥 가져가"라고 두말도 않고 다시 계산대 위에 참고서를 올려놓던, 퉁명스런 아주머니가 지키던 곳. 그곳에는 늘 흥정이 있었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쥐고 나는 늘 씁쓸하게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그 곳은 언제 사라진지도 모르게 사라졌고, 다른 헌책방들도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기억을 쫓아, 헌책방을 찾아간다. 익산의 원서점과 정읍의 서울서점. 그 많던 헌책방들은 물론이고 대도시의 대형서점들마저 속수무책 쓰러지는 시대를 꿋꿋하게 버텨온, 아련한 우리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다.

 

 

 

"나도 손님도, 책방도 늙어가는 느낌"

원서점은 익산시 남중동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시장 근방의 이리여고 맞은편이다. 근방에 학교들이 많아, 예전에는 헌책방들이 즐비하던 곳이다. 현재는 다 없어지고, 이곳 원서점 하나만 남았다. 헌책방들이 있던 곳에는 대신 인쇄소들이 들어와 이제는 인쇄골목이 되었다.

원서점은 2층의 제법 규모 있는 서점이다. 1층은 참고서와 신간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고, 2층에 헌책을 올려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헌책이 즐비하다. 계단을 완전히 올라가면, 1층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수 만권의 헌책들이 차곡하게 쌓여 새로운 주인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나도 팔아본 적이 있는' <맨투맨>, <성문영어>, <정석수학> 등이 정리되어 있는 책장. 족히 수백 권씩은 될, 똑같은 종류의 참고서들이 해마다 조금씩 바뀐 저마다의 얼굴로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원서점을 지키고 있는 이는 김미화(46) 씨다. 1995년 헌책방을 운영하던 남편에게 시집와 벌써 20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래도 인근 학교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죠. 잘 될 때는 직원만 해도 열 명이었어요. 신학기 같은 때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곤 했죠. 그런데 요즘엔 누가 남의 손때 묻은 책을 보려고 하나요. 연년생 아이들도 다 새 책을 쓰는데요. 학교 교과과정도 워낙 자주 바뀌어서 헌 참고서 같은 경우는 이제 거의 의미가 없어요."

현재 원서점이 주로 취급하고 있는 헌책은 아동전집이다. 알뜰한 학부모들이 아이들이 커나가는 것에 맞춰 헌책을 돌려가며 구입하고 되판다. 주로 단골들이다. 20여 년 전, 아이들 아동전집을 구입해가곤 했던 손님이 이제는 손주들을 위해 이곳을 찾는 경우도 있다.

"시집와서 지금껏 이 일만 해왔네요. 세월이 많이 흐른 것 같아요. 그 사이 저도 서점도, 그리고 헌책을 찾으시는 손님 분들도 나이가 많이 드신 것 같아요."

 

 

 

 

"버릴 책 내가 거둬 나눠주니 얼마나 좋아"

서울서점은 정읍에 있다. 현재 정읍에 남은 유일한 헌책방이다. 가장 붐비는 정읍시내 거리에서 한 블럭 뒤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다. 알고 오지 않으면, 찾지 못할 위치다. 하지만, 서울서점은 정읍을 넘어 서울에서도 찾는 이가 있을 만큼 헌책방으로서는 꽤 유명한 곳이다.

입구 모양으로 봐서는 누가 봐도 작은 규모다. 그냥 소도시에 마지막 남은 작은 헌책방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새 책을 파는 일반 서점 못지않은 정갈함과 기다란 미로 같은 구조, 그리고 그곳에 쌓여 있는 책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50년 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노병관(77) 씨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는 얼추 계산해볼 엄두마저 나지 않을 만큼 많다.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길을 따라 한참이나 들어가고 나면, 안쪽에 또 다른 방이 나타난다.

서울서점의 역사는 50년이 다 되었다. 사실, 처음 헌책방을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노병관 씨도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한다. 서점 한 켠에 걸려있는 사업자등록 증엔 1976년 개업했다고 되어있지만, 시작한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등록을 했으니 50년 정도 된 것 같다고 유추할 뿐이다.

이곳 역시 잘 될 때에는 온 식구가 하루 종일 서점에만 매달려 일했다. 부부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헌책을 구해오고, 나머지 식구들은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이제 이곳도 헌책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간혹 고서나 '돈이 되는 특별판'을 구하는 손님, 그리고 취미삼아 읽을 책을 찾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뿐이다. 장성하여 분가한 자식들도 '이제 그만하고 좀 쉬면서 사시라'고 핀잔이다. 하지만, 못 닫는 이유가 있다. 50년, 거의 한평생을 이곳에 바쳐왔다. 무엇보다 지금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어서다.

"돈 벌려면 못하죠. 나야 이제 자식들 다 키워놓고 쉬엄쉬엄 하는 거지. 지금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많이 왔었다고 한 번씩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요. 그 분들이 사진도 찍고 인터넷에 올려줘서 간혹 서울에서도 찾아오고 그래요. 또 가끔 책 팔겠다고 찾아오시는 손님들도 있어요. 50년 동안 이걸 했으니 딱 보면, 앞으로 팔릴 책일지 아닐지 한눈에 알지. 그런데 그냥 다 사줘요. 안 잊고 찾아와 주는 것이 고맙잖아. 남이 버릴 책 내가 거둬서, 필요한 사람들 손에 쥐어 주면 얼마나 좋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