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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 | 특집 [저널의 눈]
'헌 책'의 가치를 나누는 보물창고
헌 책방 이야기④
윤성근(2015-10-15 13:52:23)

 

 

오늘 인터넷 뉴스로 32년 동안 운영하던 고서점 '호산방'이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서위주는 아니지만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호산방은 헌책방, 고서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전드'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이끌어 온 박대헌 선생은 우리들에게 수퍼맨같은 존재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호산방 가게 앞을 기웃거리면서 헌책방에 대한 꿈을 키웠던 사람이다.  마침내 2007년 동네 골목에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이라는 가게를 차렸을 때는 어떻게 아셨는지 먼저 전화까지 걸어서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셨다.  그것도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말이다!  젊은 사람이 헌책방을 차려놓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그 전화 한통은 실로 큰 힘이 되었다.  그런 호산방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니 슬픈 일이다.  기사에서 박대헌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서에 대해, 그 안에 들어있는 가치에 대해 잘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은 호산방을 접고 삼례 책 마을 사업에 집중하려는 것 같다.  좋은 결실이 있기를 응원한다.

제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책을 뒤적이며 지혜의 바다를 헤엄치는 일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즐거움인데 그런 재미를 사람들이 너무 몰라주는 것 같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헌책방을 운영했고 다른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한 것 까지 더하면 나도 10년이나 헌책 일을 한 것인데 매번 사람들의 그런 태도를 느낄 때마다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우선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면 하대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가격이 비싸다면서 훈계를 하는 분도 있다.  책을 훔쳐가는 사람도 많다.  책을 사갖고 간 다음 한 두 달 있다가 환불을 해달라며 가져오는 이들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난감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헌책방을 하는 이유는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책에 둘러싸인 삶이 편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그런 게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진상 손님'도 적지 않지만 반대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이런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풀리고 일하는 게 즐겁다.

내가 헌책방을 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다.  그때 우리 집 옆에는 대학생 형들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책을 좋아하던 내게 그 형들은 대단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방 안 가득히 책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형들은 그 책들을 거의 다 헌책방이라는 곳에서 샀다고 말했다.  헌책방은 책을 싸게 파는 곳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그 후로 가끔씩 형들을 따라서 헌책방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본 풍경이란…….  주인아저씨는 거의 매번 의자에 앉아 졸고 있거나 다른 손님과 즐겁게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면 바둑이나 장기를 뒀다.  그런데 손님은 끊이지 않고 들고났다.  주인이 장기에 너무 빠져있으면 심지어 손님들이 알아서 책 가격을 계산하고 나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편하게 일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장에 내 꿈을 '헌책방 주인장'이라고 정했다. 

하지만 어릴 적 꿈이 그대로 실현되는 일은 별로 없다.  나 역시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1990년대를 IT회사에서 일하며 보냈다.  그러다 2002년, 사람들이 월드컵 열기에 정신을 뺐기고 있었을 때 내게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종로에 있던, 100년이나 된 서점인 '종로서적'이 문을 닫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문이 닳도록 다녔던 종로서적이 없어진 것을 보고 회사에 사표를 내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 그렇게도 원했던 헌책방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출판사와 또 다른 헌책방 직원을 거쳐서 2007년에 드디어 작은 헌책방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어릴 때 봤던 것처럼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만족하며 일한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이라는 이름은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지은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왔다.  여기에선 기본적으로 헌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독서모임, 공연, 전시, 영화상영 등 문화 활동도 겸하고 있다.  나는 책이라는 물건을 팔고 싶지는 않다.  책은 그 안에 무궁무진한 힘을 간직한 매체다.  이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책을 매개로 한 여러 모임과 공연 등을 기획한다.  하다 보니 조금씩 일머리도 늘었고 책이라는 한 가지를 갖고 이렇게나 파생시킬 수 있는 일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여전히 놀라운 영역을 발견하는 중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책 속에 있는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책은 그저 글자가 적힌 종이뭉치와 다르지 않다.  책은 뚜껑을 열어보지 않은 보물 상자다.  그 안에 어떤 값진 것이 들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름한 상자라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서서 열어보는 사람이 안에 들어있는 보물을 한가득 가져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헌책방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가치들이 가득 쌓여있는 보물 창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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