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대의는 언제나 깊고 처절하다. 더구나 민족과 백성의 운명을 걸었으나 힘에 부쳐 실패하고 만 혁명의 마지막 장면은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동학농민혁명에는 그 분노와 저항, 절망과 회한이 서려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고 혁명가들을 기리는 작품에는 늘 비장함과 비애의 정서가 넘쳐난다.
전봉준 장군 순국 120주년을 기념한 음악극 <녹두새 훨훨 날다>(문병학 원작, 곽병창 연출)도 기본적으로는 비장했다. 그러나 이 공연은 그간의 동학농민혁명 작품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의 정체는 완전하진 않지만 일종의 '사람냄새' 같은 것이었다. 아, 전봉준 장군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혁명에 등 떠밀려 들어가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살아있었다.
피노리의 주막, 전봉준 장군이 잡혀가는 그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원평댁의 원통함은 민족의 운명이나 혁명의 실패가 아니라 더운 국밥 한 그릇을 끝내 먹이지 못한 채 장군을 보냈다는 슬픔이었다. 전주성 점령 이후 농민군이 정부군에게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설명하는 장면은 이 공연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대목이었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이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혁명가의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농사짓는 아낙의 시점과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말하자면 그간의 공연과 드라마들이 폐정개혁안을 강직하게 읽어내는데 주력했다면 여기에서는 폐정개혁안이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청춘과부의 개가라는 소재는 여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상징했고, 토지의 평균분작은 백성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자 그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순박한 기쁨을 보여주었다. 작가와 연출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리는 것 아닌가 싶었던 그 장면들을 한바탕 슬픈 꿈으로 넘기는 반전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면서도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번 공연이 나름의 진전을 보여준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이 공연에 그동안 개별 작품으로 만났던 시와 소설, 그림과 판화 등이 거의 집체창작과 같이 곳곳에서 녹여졌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봉준이>나 이광재의 <봉준이 온다>, 이기홍의 그림과 박홍규의 판화가 이 작품에서 모두 큰 몫을 맡았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내놓은 성과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저 높은 곳에서 조금 가깝게 끌어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 역시 원작자와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진 측면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을 정치가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의 관점에서 보겠다는 자세가 마지막까지 견지되었다.
미덕이 훨씬 많았지만 작품은 전반적으로 복잡했다. 해야 할 이야기는 너무 많고 시간과 인력은 부족했다. 전체 극의 시점을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피노리에 놓고 무대 중심에서 그 전후의 스토리를 회고기법으로 풀어가는 방식은 좋았으나, 너무 많은 사건들이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오히려 난해해진 느낌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중요 사건들을 과감하게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졌고, 그 점이 공연 자체의 흐름을 어수선하게 만든 요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과감하게 줄거리를 압축하고 핵심적인 사건과 스토리로 전체 흐름을 한번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민중의 관점을 중심으로 놓고 보니 혁명의 주적이 모호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왜 싸우는지는 알겠는데, 누구와 싸우는지가 애매했다.
전체 줄거리의 구성에도 아쉬움은 있었다. 동학농민군 최대의 승리였던 황토현 전투의 존재감이 약했던 것, 전주성 점령에서 보여준 전봉준 장군의 지략과 전술, 2차 봉기의 핵심 목표였던 반외세투쟁의 의의와 결의 등이 절실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공연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 우석대 태권도 공연단의 출현은 우금치 전투보다는 황토현이나 전주성 점령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황토현 전투에서는 태권도 공연단의 힘과 높이가, 전주성 전투에서는 전봉준 장군의 지략과 작전이 돋보이는 구성이면 좋겠다.
또 최대 하이라이트인 전봉준 장군의 구출사건이 전체 공연의 맥락에서 결정적인 의미부여를 받지 못한 것도 아쉽다. 원작자인 시인 문병학은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처형 직전의 전봉준 장군이 구출된다는 설정을 제시하면서, "꽃 진 자리 그 상처 위에 열매가 맺히듯이 갑오년 겨울산하에 붉게 뿌려진 동백꽃, 농민군의 선혈이 한국 근대민족민주운동의 혈맥이자 백두대간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 설정과 뜻에 깊이 공감하고 지지한다. 음악극이므로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전체 스토리에서 구출사건과 그 이후를 녹여내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전봉준 장군이 왜 구출되어야 했고, 그 후에 그가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탈출한 전봉준 장군이 타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서 홍길동의 율도국이 떠올랐다면 작가에게 실례인가. 어쨌든 문병학 시인 덕분에 동학농민혁명과 한국 근대사에 대해 상상력이 넘치는 작가들과 연구자들이 한참을 더 토론하고 고민해야 할 토론 테이블이 하나 만들어졌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전봉준 장군의 체포와 심문과정에서 부각되어야 할 스토리는 전봉준 장군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회유와 설득이라고 본다. 실제로 일본은'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겠다. 일본과 협력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바로 세우자'고 전봉준 장군을 유혹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41세의 젊은 혁명가에게 이 유혹이 얼마나 그럴 듯 했을까. 당연히 전봉준 장군은 단호하게 그 유혹을 뿌리쳤다.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의 근대혁명만이 아니라 반외세 반일투쟁의 불꽃이 되는 기준점이 세워진 것이다. 전체 공연에서 반외세의 목표가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는 점과 전봉준 장군의 구출사건이 다소 싱겁게 마무리되는 문제의 해결방식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동학농민혁명은 사실 매우 복잡한 사건이다. 1894년 갑오년 한 해가 결국 그 이후 한 세기의 역사, 특히 조선과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꿨다. 이야기를 확산시키자고 들면 끝이 없는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래도 이렇게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장군을 기념하는 우리의 생각과 정신은 진전되어간다. 개인적으로는 음악극 <천명> 이후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 공연이 단 하루 단 1회로 끝났다는 점이다. 많은 지역 예술인들이 이 공연을 위해 헌신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뜻에 공감하고 우정과 헌신으로 기꺼이 출연한 그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공연은 더 올려져야 한다. 절창을 들려준 언례(방수미 분)과 원평댁의 노래도 더 들어야 하고, 줄거리와 무대도 계속 고쳐서 더 잘 만들어야 한다. 브랜드 공연은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