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전은 국내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 미술 전시들과는 다른 시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현대미술전은 엥크밧 락바도르의 <취객, 2015>의 작업이나, 또는 바산 시티켓의 <매옹 댐 반대 시위>의 작업을 보면 70년대와 80년대의 국내의 정서들을 느끼게 하거나, 또는 마닛 스리오니취품의 <핑크 맨 오페라>의 작업을 보면 일종의 키취적인 정서까지 느끼게 한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전은 아시아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거나 또는 아시아 각국의 발전들을 통해 변해가는 아시아를 조명하는 이미지들을 기대하고 관람하고자 하는 시각에서는 어리둥절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전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은 국내에서 열린 아시아 미술전들 중에서 시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가장 큰 비전을 지니고 있는 전시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은 아시아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전체주의의 시각으로 개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전체를 만들어간다는 이념으로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플랫폼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은 "우리는 매년 아시아현대미술전을 개최하여 아시아 각국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상 그대로 표출되고 소통되는 기회를 만들 것입니다."라는 장석원 전북도립미술관장의 말에서 보듯이 거대한 항해를 알리는 서막과도 같은 것이다.
그 거대한 항해는 개인의 존중을 통해 전체를 이루어가는 아시아 고유의 정체성을 정립해 가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한다는 것은 과거를 잊거나 미래의 발전된 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 전시는 아시아현대미술전의 국제 세미나의 장석원 전북도립미술관장의 "무엇이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발제문의 내용들이나 우다큰이 '우리는 무엇을 말해도 된다. 친애하는 당신에게'라는 발제문에서 "우리들은 후기 식민주의부터 시작해서 이행기 정의를 그리고 현재의 세계와 자유시장 및 자본누적과도, 변화된 노동의 위선적인 문명화, 사회복지의 후퇴, 생태환경의 파괴의 고통에 대하여 논의하였지"라고 말한 내용들을 통해 그 비전적인 의미들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는 아시아의 발전된 미래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아시안 인들의 삶의 실상들과 인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이 인식한 아시아의 문화는 마르크스가 "그들[오리엔트]은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서양]에 의해 대변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구절에서 보듯이 왜곡되었으며,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구인들의 왜곡된 관점으로 인해 서구 유럽에 의해 오랜 시기 동안 식민지하에 놓여 있었다. 그로인해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태에 놓여 있으며, 경제적인 발전을 통한 풍요로운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삶은 타인의 것을 착취하거나 또는 빼앗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만들어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문화는 서구인들이 인식하듯이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의 문화는 서구 유럽이 경제적인 발전이라는 잣대로, 모더니즘이라는 잣대로 살아간 것이 아니다.
아시아는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를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서로 함께 공존해가는 삶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 개인이 놓인 삶의 조건은 서로 다르기에 삶을 이해하는 방법 또한 서로 다르기에 공존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인 것이다. 그렇기에 장석원 관장이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에서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을 통해 언급한 '소통'은 어쩌면 아시아 현대미술을 통해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데에 있어 핵심어와도 같은 매개체일지도 모른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은 아시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가는 자리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여정은 금방 끝나는 것도 아니며, 모든 부분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소통'을 통해 가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이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하나의 거대한 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에서 빠져 있는 국가들에 대한 연구들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소통이 상대가 없는 상태에서는 성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5' 전은 경제와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아시아와 미래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시각적인 이미지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현대미술 2015' 전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인 풍경들 -"소외된 개인들의 삶의 이미지들" 또는 "독재적인 이미지들의 자화상들" 또는 "일상적인 삶의 문화적인 풍경들" 등등-은 "경제적인 발전의 잣대"나 또는 "서구의 모더니즘"의 시각이 아닌 각자가 처해 있는 삶의 조건들을 이해하고 함께 공존해가는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데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장(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