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저널초점]
80년대 민중문학와 김남주
분단시대 문학의 절정
김남주의 문학세계
오봉옥 시인(2003-09-23 10:06:34)
1.
김남주로 하여 한 시대의 끝이 있었다. 김남주로 하여 다시 한 시대의 시작이 있었다. 남주의 죽음은 그만큼 가슴에 와 박히는, 뇌리에 꽝하고 박히는 날벼락이었다. 80년 광주의 5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로부터 80년대가 ‘막힘’의 세월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막힘’을 뚫고 지나가는 한 화살을 보았을 것이다. 그 화살은 울부짖었고 거침없이 분노했다.
“보아다오 파괴된 나의 도시를 / 보아다오 부러진 난과 박살난 나의 창을 /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잘려나간 유방을 / 보아다오 학살된 아이의 눈동자를. ” 뿐이랴, 그 화살은 분파니 뭐니로 서로 갈라져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며 누구라도 껴안고 격려했다.
그런 남주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주의권의 변화 이후 이 땅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동요하고 있을 때, 좌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느닷없이 그는 죽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병상에 눕기 바로 며칠 전에 남주는 어느 자리에선가 통곡을 했다. 80년대를 깡그리 무시하고서 그 무슨 대안을 찾는단 말인가. 오히려 80년대를 엄격하고 겸허하게 되돌아 볼 때 그 무슨 대안의 실마리라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하며 조용하고 겸손하기만 했던 성품에 비추어 그 날의 흥분은 그 무슨 폭발을 예고하는 듯 했다.
감옥 안이 더 자유로웠다는 김남주. 오히려 숨이 더 컥컥 막힌다는 그의 바깥 생활은 그의 드높은 삶의 의지를, 살인적 긴장으로 쓴 시적 의지를 조금씩 무너뜨렸던 것이다.
오늘 나는 김남주 문학을 총체적으로 조망해 보자는 청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시적 깊이가 한 시대를 관통한다는 이유 외에도 확실하게 한 덩어리가 되는 경우 그의 인생역정까지를 깊이 있게 이해 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내겐 그럴만한 힘이 없다. 다만 발표된 시집들을 통해 그 일부분만이라도 조망해 볼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으리라.
2.
광주학살은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을 변화시켰다. 광주항쟁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시 세계가 주관주의적 의식의 굴곡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시기로써 척박한 현실에 대해 주정토로를 한다거나 그만큼 농촌적 순결성을 그리워하는 식이었다면 그 이후의 시세계는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체계화하고서 글을 쓰는 시기로써 현실을 명료하게 폭로한다거나 그 대안을 계급적, 반외세적 시각으로 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남주의 초기시는 농촌에서 자란 정서와 도시로 떠난 지식인적 정서가 혼용되어 발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농촌에서 자란 정서는 끊임없이 농촌의 순결성에 집착하게 된다. 도시로 떠난 지식인의 정서는 자조적 미학을 보여준다. 유신시대의 ‘막힘’에 정면으로 다가서기 보다는 다분히 자조적 토로를 하고 마는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주의 초기 문학은 지식인적 자조와 농촌적 순결성에 대한 그리움이 결합되어 동학정신을 만나고야 만다. 다시 말해 동학정신을 육체화 함으로써 나약한 지식인적 탈을 벗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노래」「편지」「황토현에 부치는 노래」가 그것으로써 반봉건 반외세의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하네
(중 략)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노래」중에서-
이미 노래가 된 이 시는 김남주의 초기 시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흙의 숨결을 통해 자신의 시적 고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학군의 농민의식을 육체화 하고자 하는 전진된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80년 이후의 시들에 비추어보면 아직까지도 그의 시는 ‘육체화 하고자 하는 의식’에 머물러 있을 뿐, 육체화된 의식‘의 상태는 아니었다.
80년 광주항쟁을 통해 김남주의 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유물론적 세계관을 통해 분단에 대하여, 계급에 대하여 미국에 대하여 명료하게 성격을 규정하고 나선다. 이때부터 그의 시는 보다 더 민중에 대한 철저한 복무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가 담고 있는 주제 사상의 높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대중의 본질적 요구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조정 장치한다. 80년 이후 그의 많은 시가 전투적 정서의 표현에 그와 같은 뜻에 의해 장치된 것이다. 전투적 율조는 시적 음향상 느리지 않고 빠르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80년대를 지나면서 남주의 시만큼 노래화된 경우가 없는 것도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중에게 복무하기 위해 그의 시는 그만큼 철저하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우리가 수긍하되 말하기를 꺼려하는, 그래서 늘 입가에 뱅뱅 맴돌기만 할뿐인 그런 말들을. 마치 십년 천식의 가래침을 뱉어낸 듯 후련하게 내뱉은 직설의 시. 솔직함의 시”도 바로 그 철저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선택한 간결하고 전투적인 시어의 사용, 그와 함께 어순전도법과 반복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법들은 대중에게 좀 저 빠르고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였던가
-「학살2」중에서-
이렇듯이 남주의 시는 이미 70년대의 경우처럼 현실의 포악성을 양심적 지식인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 그는 이미 ‘전사의 시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선 것이다. 전사의 눈에는 적과 나만이 보일 뿐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마주선 상태에서 시는 곧 무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살인적 긴장‘은 거기에서 나온다.
김남주는 주제설정에 있어 모호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주정부를 세우기 위해서이거나, 모순된 사회제도를 뒤집어엎기 위해서, 또는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순의 근원을 폭로하고 규탄하는데 복속 할 뿐이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10년의 감옥생활 끝에 ‘가석방’으로 나오기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출옥 후 그는 전환기의 현실, 혼도기의 현실에 몸서리치면서도 예의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한다. 80년대 감옥 안에 거둔 시적 성취에 보태어 ‘자신의 일상과 진지하게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89), 『사상의 거처』(91), 『이좋은 세상에』(92)등의 시집을 통해 혼돈기의 현실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삶을, 동요와 좌절감에 휩싸여 있는 현실을, 눈물로써 지켜볼 도리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일상을 넘어서기 위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이 시기의 김남주 문학은 보여주고 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만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갈 길 몰라 네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웬 사내가 인사를 한다.
그의 옷차림과 말투와 손등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노동자일 터이다.
지금 어디를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중략)
나는 알았다
사상의 거처는
한 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 곳은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는 것을
-「사상의 거처」중에서-
3.
시와 시인이 완벽하게 하나였던 김남주. ‘대책 없이 좋은 사람이거나 ’한없는 물봉‘ 이었던 김남주 그러나 전사의 시인이고자 했던 김남주. 그는 이제 갔다. 분단의 세월이 반세기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고통 속에서 남주를 떠나보냈다. 지금이라도 당장 민족문학 작가회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면 ’누구냐?‘하며 전화를 받을 것만 같은 김남주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정말 없는 것인가. 나는 어제도 오늘도 김남주와 만났다. 집회장의 함성 속에서 만나고 수천수만의 노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조국은 하나다 /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약하고 게으른 우리를 질타한다. 이제 우리는 김남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숨 가쁘게 살아야 한다. 그가 못다 이룬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낼 때에 그가 비로소 눈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