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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 특집 [명장의 손]
생계를 위한 노동,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황경신(2015-11-16 15:22:01)

무형문화재들의 삶이 저 마다의 고난과 지난한 과정을 품고 있지만, 기능 보유자들의 경우는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무형의 기법과 기술을 통해 유형의 것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삶은 유독 생계에 얽힌 사연이 더 많다. 지난하고 곤궁한 일상 속에서도 끝내 전통을 지켜 그 가치를 오늘에 되살린 장인들의 삶의 정신은 그래서 더 빛나 보인다.

 

 

부채 노점상 청년이 완성해 낸 태극 도안
태극선을 만드는 선자장 조충익은 고향 장수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홀로 전주로 나와 고서점에서 심부름을 하며 타지 생활을 이어갔다. 전주시민극장이 있던 1960년대, 극장 앞 도로변에서 태극선과 옛 그림, 인쇄된 명화를 파는 노점상을 하게 된 것이 태극선과의 만남이었다. 태극기의 문양을 들인 태극선에 마음이 간 그는 부채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어깨 너머로 제작기술을 습득했다. 제자로 입문해 본격적인 전수를 받기에는 여의치 않는 형편이었다. 절실했던 만큼, 그의 눈썰미와 손재주가 따라주었고 태극선 도안을 5년 만에 완성하면서 '삼태극 작도법'을 고안해냈다. 결국 그의 작도법은 표준이 없던 당시 부채업계의 '비공식 표준'이 되었고, 제각각이던 태극의 모양과 비율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가족을 위한 바느질은 왕의 옷이 되었다
전라북도의 유일한 침선장 최온순은 1937년 생으로 모두가 힘든 시절, 9남매 중 여덟째 딸인 덕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익히러 양재학원을 다녔다. 군산 임피에서 이리(익산)까지 매일 20리 길을 걸어 다니며 바느질을 배우고 가족들 옷을 만드는 것은 물론 집안 살림을 도왔다. 결혼한 이후에도 시집의 16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의복과 생활용품에 필요한 바느질은 그의 몫이었다. 그의 바느질은 '노동'이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양재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리키며 그의 노동은 전문직업이 되었고, 자식들의 도움으로 그가 지은 우리 서민들의 옷을 모은 전시회를 열며 이를 계기로 궁중의상 복원연구를 하던 대학교수들을 만나게 되면서 태조 이성계 청룡포를 복원해냈다.

 

 

우연히 마음을 빼앗긴 그것의 장인이 되다
못이나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문의 네 귀퉁이를 절묘하게 들어 맞히는 전통창호를 만드는 소목장 김재중의 시작도 가난을 면키 위한 것이었다. 기술이라도 배워야 겠다는 생각에 목공소를 찾아가 나무 먼지를 뒤집어 쓰고, 대패질에 손에 망가지면서 세월을 이겨냈다. 우연한 기회에 본 절 간의 문에 마음을 뺏겼고, 이후 그는 연장 한 벌을 얻어 나와 전통창호를 하는 장인들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기술을 익혔다. 결국 불교 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꽃살문 재현에는 김재중이 최고'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대금을 제작하는 악기장 최종순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다. 종일 논밭에서 지내던 중 우연히 들려온 퉁소 소리에 반한 그는 군 제대 후 대금 연주자 이생강 명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을 하면서 대금과 첫 인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형편으로 구할 수 있는 대금의 소리가 좋았을 리 없었다. 연주를 위한 소리 좋은 대금을 찾다 결국 그는 대금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대금 제작에 온 열정을 다 했지만, 가정의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던 그는 농사를 짓고, 버스운전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대금 제작을 하며 기술을 숙련해 나갔다. 대금 연주에도 능한 악기장이 만든 대금의 소리가 최고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은 스승이었던 이생강 선생이 그의 대금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린다.

 

 

'무작정' 열정이 내어준 명품의 길
우리나라와 달리 지금도 옻칠산업이 발달해있는 일본에서 더 인정을 받고 있는 옻칠장 이의식도 아버지 사업 실패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전주의 한 가구점 보조일이 그 시작이었다. 보조 업무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가구의 기능과 예술성을 높이는 옻칠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결심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국내 최고의 장인들에게 옻칠을 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24살 젊은 나이에 공방을 차렸지만 결과는 실패. 하지만 그는 더 큰 시장을 찾아 나섰다. 옻칠공예의 최대 시장인 일본으로 여동생의 쌈지돈 50만원을 빌려 떠났다. 일본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그는 일본 매장과 백화점을 돌며 명함을 뿌렸고, 샘플을 보내며 일본 바이어들과의 교류에 성공하게 된다. 일본에서 돌아온 날부터 꼬박 1년이 걸려 얻어낸 결실이었다. 

19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청장년 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보유자들은 생계를 위한 기술 습득이 많았다. 재료에 대한 탐구, 우연 혹은 자연 발생적인 노력과 개념들이 모여 '제품'의 근원이 되었고, 그들을 장인의 길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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