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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 인터뷰 [인터뷰]
경계를 허무니 소리가 들리더라
방수미 국립민속국악원 상임단원
문동환(2015-11-16 15:29:15)

 

 

 

춘향이 역을 맡으면 청초한 춘향이가 되고, 별주부전의 토끼 역할을 맡으면 익살스러운 토끼로 변신한다. 소리는 맑고 청아하되 때로는 탁한 쇳소리가 나기도 한다. 방송에서 사연을 읽을 때의 소리는 또 다르다. 고향은 서울이지만 사는 곳은 상관면이고, 직장은 남원이지만 전주를 자주 오간다. 소리꾼으로서의 소리도 공연에서의 역할도, 난 곳과 오가는 곳도 모두 다르다. 언제나 경계에 머물러 있는 소리꾼, 방수미 명창이 그렇다.

 

방수미 명창의 시골생활도 근 20년이 다 되어간다. 스물두 살 추계예대 재학 중 남원민속국립국악원 단원 오디션에 합격해서 이듬해부터 정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올해 나이 마흔이니 18년이 지난 일이다. 나름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와서 보니 소위 한 자락 하는 단원들이 많았다. 특히, 소리꾼이라고 해서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국악의 다양한 분야들을 두루두루 소화해내는 선배동료들의 모습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입단 이후 한동안은 울면서 출근하고 울면서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모르는 건 공부하고 익히기를 반복했다.

 

"네 살 때부터 끼가 많아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니까 연기학원까지 다니게 됐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해서 2학년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했고, 4학년 때부터는 국립국악원 창극에 아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실패라는 걸 몰랐던 거죠. 집도 잘 살았고" 어렸을 적부터 신동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소양이 있었고 활동도 누구보다 활발하게 이어갔다. 실패는 그저 사전 속에서 정의되는 낱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춘기 이후 소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슬럼프는 국악원 단원으로 활동하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도 크게 기울었다. 소리를 해서 버는 돈은 모두 부모님에게 보냈다. 자연스럽게 모든 공연과 활동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겨졌다. "이걸 하면 돈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만 있었다. 예술적인 감수성 따위는 사치스러웠고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방수미라는 이름은 사람들 뇌리 속에서 흐릿해져갔다.

 

"서른 살 즈음이었을 거에요. 국악원에서 대본연습을 하는데 다른 때와 다르게 제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들어오는 거에요. 그 때 알았죠. 아!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무대에 서는 내 모습이 행복한 거고 이게 내 천직이구나. 그래서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서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씀드렸어요. 엄마, 소리를 하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당시 20년을 넘게 소리를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스스로의 소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갖게 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는 뭣 모르고 했고, 사춘기 이후에는 슬럼프가 있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집안을 돌봐야 하는 처지로 돈 버는 일에 매달렸다. 예술의 가치나 자부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출연하는 작품에 대해서 방수미식의 해석을 하고 소화하려는 노력도 그 때부터 시작됐다. 길게 이어진 어두운 터널이었지만 그 기간이 없었다면 소리에 대한 열정도, 예술을 이해하는 균형 잡힌 시선도 없었을 것이다.

 

방수미 명창은 요즘 가장 '핫'한 소리꾼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악원 단원으로서 작품 출연은 물론이고 국악방송 진행자, 서울의 국립국악원 작품 출연 등, 예전에 비해 보폭이 크게 늘어났다. "긴 시간 동안 슬럼프가 있었는데, 그게 한 18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전주에서의 활동이나 서울 활동 이런 게 많아지니까 주변에서도 '대세'라고들 하세요. 그렇다고 제가 진짜 잘 나가는 소리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러진 않구요, 그냥 이제는 좀 여유가 생긴 거 같거든요" 방수미 명창의 소리 인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키워드는 여유와 균형이다. 잘한다는 소리에도, 못한다는 혹평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잘하면 기쁘게 받아들일 뿐, 못한다고 하면 다음에 잘한다는 생각으로 털고 만다. 어차피 평가나 감상에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인터뷰 도중 특별하지는 않지만 인상 깊게 들려준 경험담이 하나 있었다. "해외 공연을 갔는데 젊은 공무원 한 분이 리허설을 계속 시키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아... 이게 충분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젠데 상대방이 말하기에 따라 다르고, 내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르구나" 방수미 명창은 어디를 가도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서울사람이면서 서울에 가면 지방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으로 여겨지고, 지방에서는 서울사람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남원에서는 전주사람으로, 전주에서는 남원에서 온 사람으로 사람들이 생각한다. 원래 성격이 모나지 않은 성격도 아니었지만 이런 경험과 이력은 경직된 태도를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해져 스스로를 구석으로, 구석으로 자꾸 몰아가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대끼고 다양한 공연에 참여하게 되면서 한 걸음 떨어져서 스스로를 관조하게 될 수 있었다. 한 숨 내쉬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사람과 예술을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국악방송 '온고을상사디야' 진행은 소리꾼 방수미와 인간 방수미로서의 넉넉한 품을 키우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접수되는 다양한 사연들을 읽어가면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방송일은 서울 국악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한 게 인연이 돼서 시작하게 됐는데, 저에게는 너무 재미있고 보람된 일이에요. 제 성격도 원래는 그렇게 둥글둥글한 건 아닌데 방송 일을 하면서 더 바빠지긴 했지만 얻는 건 정말 말할 수가 없죠"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 동안의 '온고을상사디야' 진행은 그녀에게 해방과 탈출의 시간이다. 이 시간만큼은 마음 풀어헤치고 실컷 즐길 수가 있다. 게다가 맘껏 즐기면서도 다른 누군가와 교감하고 품을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경험이다.

 

공연출연에 방송진행이 끝이 아니다. 방수미 명창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요 키워드는 또 있다. 소리선생. 방수미 명창은 국악원에서 소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로 지속적으로 제자를 가르쳐왔다. 소위 말하는 레슨비는 많이 받지 않는다. 어차피 가르치는 제자들이 넉넉한 형편도 아니다.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방수미 명창의 열정과 성의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어린 제자는 딸같이, 제법 성장해서 대학생이 된 제자는 조카나 동생같이 대한다. "제자들이 늘어가면서 제대로 된 선생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힘들어도 더 열심히 활동하는 거기도 하구요. 소리해서 잘 되면 예술 감독 되는 거고, 못 되면 레슨하면서 먹고사는 건데, 저는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국악인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열심히 하고 즐기면서 하다가 언제든 관둘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려면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리꾼이라면 누구나 안숙선 명창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안숙선이 될 수는 없는 일. 방수미 명창이 힘들어도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려고 하는 이유도 제자들에게 소리꾼으로서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올해도 연말까지 공연 스케줄이 빼곡히 잡혀 있다. 공연 연습에, 주말이면 방송 일과 서울 전주에서의 레슨, 전주판소리합창단 연습지도, 기타 행사참여 등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바쁜 만큼 성취감도 크지만 가장 미안한 건 아들. 아직 엄마 품에 의지하는 유치원생이어서 엄마로서의 미안한 마음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육아휴직 내고 좀 쉴 생각이에요. 준형이하고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고. 갈수록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한 거 같더라구요" 지금껏 경계에 선 소리꾼으로서 살아온 방수미, 그녀에게 확고부동한 경계가 있다면 아들을 대하는 부모로서의 역할과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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