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1994 동학농민혁명백주년
고부민란 불씨가 번져 이룬 횃불
무장기포
문경민 전북일보 기자(2003-09-23 10:14:38)
조정은 갑오년 2월 15일 고부의 사태 수습을 위한 조치로 군수 조병갑을 붙잡아 국문(鞠問)토록 하는 한편 전라감사 김문현에게도 越俸三等의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후임 군수에는 용안현감 朴源明을 임명했다. 박원명은 光州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부유한 집안 태생으로 자못 임기응변의 능력이 있고 또 본토 사람으로서 민정을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민란과 시정을 의논하는 등 회유책을 펴며 고부민요를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고부의 농민군들이 죽창을 거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 시기는 대략 3월초였다. 박원명의 회유와 설득이 어느 정도 주효한 것이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3월 3일 음식상을 크게 차려 놓고 난민을 초대하여 조정에서 농민군들의 죄를 용서하고 돌아가 농사짓고 편히 살 것을 허용하는 뜻으로 타일러 난민들이 모두 해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던 고부의 사태는 안핵사 李容泰가 역졸 8백여 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면서 급반전하게 된다. 당시 장흥부사였던 이용태는 박원명이 고부군수에 임명된 다음날인 2월 16일에「주모자를 색출하고 읍폐를 시정할 방책을 조사하라」는 안핵사의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병을 핑계 삼아 시일을 끌다가 3월 2일에야 고부에 나타났다. 이용태는 고부에 도착하자마자 박원명의 유화적 태도를 비웃고 마구잡이식 진압책을 폈다.
오하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신임군수 박원명을 협박하여 그로 하여금 민란 참가자와 괴수를 색출케 했으며 역졸은 온 고을에 퍼져 마을에 횡행하면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생선꿰미같이 포박하니 온 고을 백성의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 즉「박원명의 조치를 모두 뒤엎어 조병갑을 정당화하고 난민을 역적죄로 몰아 기필코 주륙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용태군은「起包 인민을 모두 동학이라 일컫고 이름을 列記하여 잡아들이고 그 집을 불태웠으며 본인이 없는 경우에는 그 처자를 잡아들여 살육을 감행」하는 잔인한 탄압을 계속했다. 박원명의 회유와 설득에 의해 기본적으로 해산했던 고부의 농민군들은 이용태의 보복적 탄압이 뒤따르면서 3월 13일게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초 큰 뜻을 품고 있던 전봉준은 심복 수십 명과 함께 동학 대접주 손화중이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茂長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한다. 최근 발굴 공개된「石南歷事」(전봉준의 거주지였던 조소리와 지척인 현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석지마을에 한평생을 보냈고 어린시절 전봉준으로부터 직접 천자문을 배웠던 朴文圭(1879-1955)가 남긴 자필 회고문)에는 전봉준이 모종의 거사를 도모키 위해 잠적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즉「그 후 장터(말목장터를 말함)로 도로 와서 해산을 한 후 전대장은 본시 동학민도 부하 수십 명을 영솔하고 不知去處에 헤어졌다」며 민요군이 일단 자발적으로 해산했으나 전봉준은 동학교도인 심복 수십 명과 함께 은밀하게 고부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봉준의 발길은 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장은 오늘날 고창군의 한 面으로 전락했지만 당시에는 고창 흥덕 등과 함께 전라도 53개 군현중의 하나였다. 이곳 무장에 손화중은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학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장 대접주인 손화중의 영향력은 인근의 정읍 고창 흥덕 영광은 물론 장성 나주 광주일대에 까지 미쳤다. 손화중과 전봉준은 현실적 개혁을 추구하는 이른바 남접이라 불리우는 서장옥계열로 일찍이 의기가 투합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손화중을 찾아 무장으로 길을 잡은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전봉준과 손화중 등은 동학의 조직망을 이용해 거사의 뜻을 각처에 알리고 동지를 규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갑오년 3월 21일(혹은 3월 20일) 무장 구시내에서 저 유명한「창의문」을 만방에 선포하고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을 치켜 올린다. 이를 가리켜「무장기포」라 하며「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혹은「1차 농민전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사에 무장기포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무장기포는 한동안 역사적 사실이 잘못 알려지면서 백산대회와 혼동돼 왔다. 동학농민혁명연구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던 오지영의「동학사」가 혼돈의 단초가 됐다. 오지영의 고부민요와 무장기포를 구분하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갑오년 3월 고부 백산에서 기포하여 전라도 서남부지역을 차례로 점령 뒤 4월 12일경 무장에 도착, 비로소 포고문을 발표했다는 식의 정리가 이뤄졌던 것. 그러나 가장 확실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전봉준의 심문기록인 공초에서 전봉준은 자신이 이끈 농민군 주력부대의 이동 경로를 무장-고부-태인-금구-부안-고부라고 직접 증언하고 있고 친히 其徒를 영솔하여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나라」하여 봉기의 출발점이 무장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밖에「오하기문」「수록」「석남역사」「김방선의 갑오구월 제행일기」「김낙봉이력」등의 각종 자료들이 이를 보다 구체적 뒷받침하면서 무장기포는 제 자리를 찾게 됐다.
무장기포의 구체적 장소는 구수(九水)마을 부근이다. 이곳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 속해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마을 앞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큰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구수 보다는 당산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공음면 소재지에서 상하면 소재지를 잇는 2차선 도로가에 자리한 이 마을은 당시 무장현 동음치(冬音峙)면 구수였다. 구수를 풀어 구시내로 불리기도 했다.
무장기포를 상세히 전하는 자료는「수록」이다. 수록은 일본 경도대학의 河合文厙에 원본이 소장돼 있는 총 1백23쪽 분량의 한문 필사본이다. 갑오년 3월부터 광무 2년(1898년) 7월까지 4년에 걸친 전라도 지방 관청의 공문철이다. 이를 필사한 이의 이름이나 소속관청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무주 집강소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어 무주현의 서리가 전라감영이나 조정에 오간 문서를 필사했던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록에는 무장기포의 준비상황이 다음처럼 기록돼 있다. 이는 3월 22일 접수된 무장현감 趙明鎬의 보고에 의한 것이다.
ꡒ이달 16일부터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에 수상한 무리들 수천 명이 모여 머물고 있는데 그 종적이 이상하여 여러 가지 풍설이 돌고 있으므로 영리한 이속 장교를 비밀리에 보내 염탐한즉 이들은 이 고을 사람이 아니고 거개가 다른 고을 사람인데 말하기를 동학도라 하온 바 처음에는 1백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16일부터 18일까지의 사이에 혹은 낮에 혹은 밤을 타고 사방에서 모여들어 거의 1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당산마을 앞의 들판에 진을 쳤는데 이곳은 영광과 법성고을의 접경지대이다. 이들 가운데 수백 명은 법성진 진량면 용현리(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 용현마을)의 대밭에 가서 대를 배어 죽창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각 마을의 민가에 있는 조총과 괭이 낫 가래 따위의 기물을 찾아 빼앗아 갔으며 소위 동학을 탄압하거나 반대하는 사람과 과거에 감정이 좋지 않던 사람을 일일이 잡아다 구타했다. 그리고 이웃 마을 석교천에 사는 안덕필의 집을 습격하여 다른 사람이 맡겨놓은 백미 60여석을 뺏고 그 집을 부셨으며 같은 마을 송경수의 집 살림을 역시 때려 부쉈다. 이 때문에 인접한 각 면이 시끄러워지고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소행이 참으로 해괴하나 양민과 어울려 이으므로 강력한 수단으로 금지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속과 고을의 덕망가를 보내 이치를 따져가며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보내 해산을 권하기도 했으나 그 무리들의 당장 기세는 장차 수천 명에 이르니 관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게 됐다.
저들의 말로는 일간 다른 지역으로 옮기겠다 하고 또 그 도당이 보내온 서면에도 역시 불일간 이 고을을 떠나겠다 하오나 매우 수상한 무리들인지라 그 참뜻을 측량할 길이 없는 고로 다시 이속으로 하여금 은밀히 염탐한 즉 대오를 짜기도 하고 다시 흩어지기도 하며 장차 장비를 정리하는 기색도 보이나 어느 곳을 향할지는 탐지하기가 어렵다ꡓ
이 같은 내용을 분석하면 무장 당산에 모여든「수상한 무리」는 각지에서 몰려온 동학교도가 중심이 됐으나 일부 농민들이 가세했으며 이들의 행동은 무장현감의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월 13일게 고부에서 무장으로 잠입한 전봉준은 손화중과 더불어 불과 수일 만에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무장 당산에 집결시킬 만큼 혁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탁월한 역량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들 지도부는 또 봉기의 대의명분을「무장 창의문」에 담아 만천하에 공표했다. 무장포고문에는 부패한 관료조직과 뒤틀린 사회구조를 통렬히 고발하는 한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기를 들지 않을 수 없는 동학농민군의 거사명분을 당당히 천명하고 있다.
창의문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기포의 궁극적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무장기포가 그동안 동학교문이 중심이 돼 저항 역량을 키워온「취회」나 조직성과 지속성이 결여된「민요(民擾)」와는 판이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주도세력이 동학교도였음에도 불구, 동학교문의 요구였던 교조신원이나 포교의 공인을 요구하는 내용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당시 정치 사회의 통념인 유교적 이념체계 속에서 거사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이에 따라 무장기포는 동학이라는 종교적 색채가 엷어지면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자연스럽게 결합, 폐정개혁의 의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는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즉 고부민란이 동학농민혁명의 불씨였다면 무장기포는 이 불씨가 번져 이룬 횃불이었다.
창의문을 발한 동학농민군은 무장을 출발했다. 이들의 1차 진격목표는 전주감영이었으나 고부관아를 먼저 점령해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을 응징했다. 전봉준이 4천여 명의 동학농민 군주력을 이끌고 고부를 향해 출발한 일자, 즉 무장기포일은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날은 또 무장창의문의 선포일과도 일치할 가능성이 높아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아야하나 여러 가지 사료들이 3월 20일 혹은 21일을 추정케하고 있을 뿐이다. 무장기포 상황을 가장 상세히 전하는「수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날짜 및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월 22일 수천 명이 고창으로부터 흥덕현의 후포 사포에 도착 하룻밤을 묵음. 3월 23일 부안 줄포에 도착 저녁을 먹은 뒤 酉時(하오 5시-7시)에 줄포를 떠나 고부로 향함. 3월 23일 戌時(하오 7시-9시) 3천여 명이 고부읍을 점령 향교와 공해에 머뭄.
하필이면 3월 19, 20, 21일의 기록이 빠져있다. 그러나 사포 후포에서 숙박한 22일부터 역으로 추정해 갈 때 고창을 거쳐 진격했다하더라도 21일 집결지를 출발했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 당산의 집결지와 사포까지의 거리는 대략 1백리로 당시로서는 하룻길이었다. 또한 3월 21일은 2세교주 해월 최시형의 탄신일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무장 당산에 모여든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는 여전히 동학의 접주들이었고 이들이 거사일을 정하는데「탄신일」을 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천도교 총부에서는 3월 21일을 무장기포일을 잘못 알려진「백산기포」날짜로 잡아 기념식을 갖고 있다.
-무장 창의문 전문-
사람이 세상에 살아나가는데 가장 귀중한 것은 그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군신과 부자는 인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뒤에라야만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끝이 없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사랑하시며 정신이 밝고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일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 보좌하는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의 교화(敎化)와 문경(文景)의 정치를,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 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우고 갖은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되게 간하는 선비를 가리켜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고 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만이 많아서 인민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해가고 있다. 집에 들어가서는 삶을 즐길 만한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몸뚱이를 보호할 방책이 없다. 사나운 정치가 날로 번져서 원망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다 무너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 공경 이하로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운 것은 생각지 않고 한갓 제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데 에만 급급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고 과거 보는 곳을 돈 주고 바꾸는 저자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허다하게 생기는 뇌물은 나라의 창고로는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삿집에 가득 채워진다. 나라에 쌓이고 쌓인 채무가 있는데도 이것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아 하나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는다.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으니 수재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에 힘쓰면서 한갓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임금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살고 있으니 앉아서 위태로워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이제 의기(義旗)를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는 바이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하여 다 함께 승평한 일월을 빌고 모두다 성상의 덕화를 바랐으며 천만 다행이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