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저널여정
무장기포, 그 우렁찬 함성을 따라
무장 객사에서 고창 선운사까지
강영례 문화저널 간사(2003-09-23 10:18:52)
답사를 떠나가기 전 간간히 어깨를 적시던 가는 비도 그치고 3월에 보는 무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무장에 도착하여 객사로 향하는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동네 아이들 여럿이 무슨 놀이인가 열중하고 있는 옛 무장관아 정문인 진무루로 발길을 향했다.
당시 무장현의 문턱 역할을 톡톡히 했을 진무루는 계단 아래서보면 제법 위엄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복구공사가 끝난 모양으로 계단 양옆에 새롭게 꾸며놓은 잔디를 볼 수 있다. 진무루를 지나 왼쪽 길로 몇 걸을 가니 사람의 기척이 끊긴 듯 적막한 무장 객사가 나무숲에 가려져 있다. 아직 겨울의 싸늘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이 객사는 농민군과 서로 뜻이 통하던 무장현의 이서들이 이 곳에서 창의문이 선포되었음을 가리기 위해 불태우지 말고 보존하자 건의했다고 한다. 백 년 전, 오랜 궁핍과 굶주림에 시달린 농민들의 가슴속에 불을 당긴 창의문이 선포되고 그들의 우렁찬 함성소리로 온 마을이 술렁였을 이곳은 지금 마루에 앉은 먼지의 두께만큼 세월의 무게를 껴안고 보존되어 있다.
객사에서 보면 오른편 학교운동장 쪽으로 연대 현감들의 치적비가 서 있다. 운동장에서 보면 아이들이 등교할 때마다 한번쯤 눈길을 돌려 관심을 끌만한 위치에 있는 이 비석의 행렬은 객사와 함께 나무숲에 쌓여 답사자들의 눈길을 끈다. 또한 객사에서 나와 무장초등학교 교사 뒤로 가면 그 옛날 무장관아였던 동헌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1894년 3월20일 경에 무장에 설치된 남접의 도소는 전국에 통문을 돌려 동학 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린다. 그 날, 무장을 출발해 고부로 쳐들어간 농민군들의 수가 대략 4천명에 이르고 태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경선이 이끄는 동학군과 말목장터에서 대기하던 고부농민들만 해도 천여 명, 얼추 잡아도 이 날 참여한 농민군들의 수는 오천 명을 넘어선다.
아직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참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하나로 뭉쳐진 농민들이 고부로 진군해 들어가는 모습이 들판 곳곳에 여려있는 무장 구수(九水)마을은 지금도 넓은 들판에서 농민군들이 진을 치고 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그들의 발자취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무장을 떠나오면서 고창에 잠시 들렀다. 고창에 남아 있는 동학의 자취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욕심에서다.
농민군들의 봉기가 호남벌 전역을 누빌 때 고창 농민군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은대정이란 사람의 집이었다. 고부 조병갑 못지않게 고창에서 은대정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온갖 탐학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지던 사람으로 그는 당시 관과 결속하여 농민들의 뱃가죽안의 곡식까지도 긁어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명 높은 사람 이였다고 한다.
고창 터미널에서 내려 경찰서쪽으로 10여분을 걸으면 예부터 모양(模樣)골로 불리는 고창의 이름을 딴 모양성을 찾을 수 있다. 멀리 모양산이 보이고 연이어 처진 돌담의 풍경이 마치 몇 백 년 전의 과거로 흘러온 느낌이 드는 이곳은 성 입구에 백 년 전 성난 농민군들이 불태웠다고 하는 은대정의 집터가 있다.
현재 집터는 불에 타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의분에 찬 농민군들이 진격한 그 날의 함성소리는 고창 여러 곳에 지금까지도 전해져 있는 듯하다.
또한 고창에서 동학 농민혁명의 자리취가 전해지는 곳으로 동백꽃 유명한 선운사가 있다. 산을 깎아지른 돌 벽에 새긴 마애석불의 배꼽에 숨겨진 비법을 열었다는 동학군의 얘기가 전해지는 선운사는 그 당시 동학군들의 세상 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꼭 한번 들려 봄직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