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인간에 대한 평가도 현실(지금)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영되는 하나의 욕망이 아닐까?
2015년 말미에 들려온 'YS의 죽음' 소식. 그리고 이 실존인의 종말을 통해 흘러넘친 '민주화의 산증인 김영삼'이라는 말(言)의 상찬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고사 직전 상황의 징후로, 그래서 민주주의의 장송곡처럼 들렸다면 내가 너무 오버한 걸까?
각종 언론이 YS 재평가로 시끌벅적한 요즘, 나는 DJ를 탐독 중이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고 매일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읽어 나간다. <김대중 옥중서신>. 무슨 청개구리 심보로 김대중의 글을 읽게 된 것은 아니다. 2년 전 봄, 남원 이백면에 살고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았었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몇 주 전 무심코 들른 한 서점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치게 되면 대부분은 망자에 대한 좋은 기억의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 가끔은 그런 긍정성이 '미화'의 수렁에 빠져 오래된 망령들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그 극단을 보여주는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김대중은 살아있었을 때도 그렇지만 죽어서도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인물(정치인)이다. 우에서는 '좌'라고 두들겨 맞고, 좌에서는 '우'라고 두들겨 맞았다. 그 경직된 잣대로 인해, 격랑의 한국현대사를 고난의 뱃길로 헤쳐 온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금기의 선 넘어 어느 곳에선가 '호남정치인'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폐기처분되어 있다.
물론, 김영삼이 그런 것처럼 김대중에게도 빛과 그늘은 있다. 하지만 그 공과에 대한 평가마저 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의 작동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면? 이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한민국 기성세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자유롭지는 못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를 깊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꼭 그러한 부채의식이 아니어도 <김대중 옥중서신>은 누구나 꼼꼼히 열독할 만한 좋은 책이다.
<김대중 옥중서신>을 읽다보면, 한 실존인으로서의 김대중, 그리고 한 집안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김대중이 읽히다가, 어느 순간부턴가는 사상가로서의 김대중이 읽힌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단련한 그의 지성이 훗날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에 온전히 발휘되었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적어도 '김대중 생각(사상)'의 알맹이를 들여다보게 된다.
신군부의 음모로 차디찬 감방 안에 갇힌 그는 동서양 고전과 철학, 역사, 종교 등을 통해 커다란 비전을 세워나갔다. 그 비전을 그는 가족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어 했다. 그가 교도소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놓은 문장들은 그 열망의 결실이었다. 그래서일까. 30여 년 전 그가 세운 희망의 품은 깊고 넉넉하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김대중 옥중서신>은 전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우리의 역사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적어도 그에 관한 편견과 선입견만 걷어낸다면 말이다.
어수선한 세밑, 그래서 나는 오늘 밤에도 그의 편지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