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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문화저널]
새로 찾는 전북 미술사 민화적 소박성 보인 전문화가 아닌 선비화가 이덕익
이철량 한국화가, 전북대 미술교육학과 교수(2003-09-23 10:27:14)
조선조 중기, 그러니까 적어도 18C초까지의 자료들이 매우 빈약하여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작가들을 확인하기란 간단하지가 않다. 그중 앞서 언급된 작가들을 확인하기란 간단하지가 않다. 그중 앞서 언급된 이상좌나 이명욱, 최북 등은 중앙화단에서 화가로 입신하여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거나 기록들이 다소나마 전하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나고 활동하면서 작품을 남긴 화가들도 적잖게 있었을 것이며 최근 들어 지역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중앙에서의 미술의 큰 흐름과 상관없이 필묵에 마음을 의탁하며 순박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틈이 그림에 몰두한 사대부 화가 이덕익(李德益1604-?)은 이러한 화가들 중에 현재 확인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자료로서는 현재 호남한국화 300년 도록을 참고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덕익은 전주에서 출생하고 전주에서 살았다고 알려진다. 호를 석천(石川)이라 하고 자(字)를 계윤(系潤)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나이 35세 되던 해 인조(仁祖)17년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여 사의(司儀)벼슬을 하였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에 몰두하여 작품을 남겼으니 사대부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 그의 화가로서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여기에 소개되는 매화쌍작도(梅花雙雀圖)를 통해 보면 그의 화가로서의 역량은 그리 높지 않았던 듯 하다. 어떻든 현재 확인되고 있는 자료로서는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또한 어떻게 하여 어떤 유형의 그림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단 이 작품을 통해 보면 그는 어느 전문화가에게 특별히 그림공부를 하였던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어떤 특별한 유형의 그림공부를 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그가 벼슬길에 있으면서 특별히 그림에 취미가 있고 즐겨 필묵을 잡아 현존하는 유형의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제일의 인기품목 매화쌍작도 이 매화쌍작도는 화조화로서 당시 민간에서 가장 널리 감상되고 있는 소위 제일의 인기품목이다. 이 작품으로만 보면 이는 독립된 하나의 것이 아니고 두폭의 가리게 형식이었거나 아니면 여러 폭의 병풍모양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화면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고목나무가 왼편에 지나치게 많이 짤려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림 맨 윗부분에 쓰여진 화제(畵題)에 본인의 성명이나 호를 쓰지 않고 인장만 찍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모든 그림에서 다 그러한 것이 아니나 당시 대체적 관행이었던 점으로 보아 생각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전문화가의 화풍이라기보다 소위 민화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정도의 기량이라고 보여진다. 매화나무를 그려나간 필세의 기운이 충분히 살아나 있지 못하다. 고목의 아랫부분의 등걸 포현이 형식화 되어있고 꽃이 맺혀있는 작은 가지에서도 붓이 힘이 없어 보인다. 피어있는 매화꽃은 술이 너무 길고 날카로와 유연한 꽃매무새가 부족하고 윤곽선 위주의 선묘로 그려진 두 마리의 참새도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이 더욱 민화의 저급한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은 형태의 반복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고목 아랫부분의 등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물결모양의 진한 먹선이 대단히 형식화되어 있고 또한 화면 중앙부분에서 새의 방향으로 뻗은 매화의 새 가지들이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가지모양의 반복은 군데군데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잔가지에 달려있는 활짝 핀 매화꽃도 똑같은 모양새로만 그려져 있다. 또한 두 마리의 참새그림에도 묘사가 현저히 떨어진 형식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매화나무에서 나타나는 먹색의 표현이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는데 기본 줄기는 담묵으로 그리고 그 위에 찍어나간 태점(胎占)들은 진한 농묵의 두 색만을 사용하였는바 이것도 현저하게 뒤떨어진 기량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민속화가 갖는 담백하고 소박한 맛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필묵의 운용에서보다도 화면구성에서 한결 돋보이고 있다. 화면 구석구석 놓치지 않는 세심한 배려 전통적인 수묵화가 여백의 아름다움에 의해 주도되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아랫부분에서 상단까지 쭉 뻗어나간 고목줄기가 그림 좌변으로 바짝 밀어붙이며 중앙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어 화면 전체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있다. 그런가하면 줄기 밑둥부분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진 가지는 떠오르는 둥근 달덩어리를 연상시키며 또 다른 작은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그림 상단 끝부분에 뻗어나간 가지는 브이(V)자 형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가지모양으로 새가 날고 있는 중심공간은 한층 더 압축돼 보이고 화제를 써넣은 상단이 허(虛)의 공간이 아닌 실(實)의 공간으로 꾸며지고 있다. 이렇듯 화면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세심한 배려를 통해 구성의 묘미를 이끌어내고 있는데 그 구성의 극치는 역시 화면 중심을 크게 원형의 빈 공간으로 하고 그 안에 운동감이 충만한 한 쌍의 새를 그려놓음으로써 화면전체에 활기를 불어놓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서예에 더 일가견 보였던 작가 이렇듯 이 작품을 통해서 보면 이덕익은 본래 전문적인 화가였다기 보다 그림 상단에 써넣은 글씨를 통해 서예에 더 일가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틈틈이 그림에도 관심을 가져 안목을 높였던 것 같다. 이는 비록 운필이나 묘사에 있어서는 현저히 기량이 떨어지나 화면 경영에 있어서는 가히 일가견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아쉬운 것은 그가 그림에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필자의 부족으로 더 이상 확인이 안 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 무렵 이덕익과 같은 사대부 계층에서 많은 작가들이 있었을 것임에도 남아있는 작품이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7C이후에 들어서면 서예에 밝았던 인물들이 많이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적어도 우리나라에 근대교육이 시작될 때까지는 그림과 글씨가 특별히 구별되지 않았다. 소위 글씨와 그림은 그 근본이 하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당연시 하였다. 때문에 기록에 남아있는 서예가들 대부분은 이덕익과 같은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나 유존하는 작품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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