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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 | 특집 [가족 그리고 일]
할머니 박야무, 아버지 김종오, 아들 김병수
당연한 대물림, 친환경 농법 고수 순창 <아동실농장>
최정학(2016-02-15 09:38:13)

 

 

순창군 동계면, 섬진강 줄기 옆에 자리한 아동실농장의 매실나무에는 이미 봄이 와있다. 매운바람을 이겨내고 줄기마다 꽃봉오리들이 맺혀있다. 봄 농사를 위해 요 며칠 계속 매실나무 가지치기에 매달리고 있는 앳된 얼굴의 젊은 농부 김병수 씨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이제 귀농 5년차. 오직 농사만 생각하고 매달려온 시간이었다. 쳐내야 할 가지를 골라내고 자르는 손길이 오랜 농부 못지않게 능숙하다.

 

전주에서 나고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김 씨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이어 농사를 짓겠다고 이곳 순창 동계로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 전까진 꿈에도 농촌생활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도시 생활이 익숙했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하던 일이 어려워져 순창으로 귀농하게 되었을 때도 혼자만은 기어이 광주에 남아 있었다.
군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농사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생겼다. 주소지가 순창으로 되어 있어, 농사 이야기 하는 동기들이 몇 있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제대 후 일용직 일을 하며, 작은 밭을 얻어 직접 농사를 지어보았다. 첫 작물은 콩. 2012년이었다. 그해 그는 두 가지 경험을 했다. 한 알 심어 놓은 콩이 나무가 되고 또 거기서 수많은 콩들이 달려 나오는 것을 직접 보며 설렜고, 또 하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 해 수확한 감이 공판장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려나가는 것을 보며 이게 뭔가 싶었다. 농사의 가능성과 절망을 함께 경험한 것.    
그 해 겨울 마음먹고 공부했다. 친환경농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블로그를 통해 소비자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농부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길을 정했다. "저도 이곳에서 같이 살겠습니다." 딱히 할머니와 아버지가 말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래 버틸지 생각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빨리 큰 도시로 나갈 기반을 잡아라"는 말로 이제부터 함께 농부가 될 손주와 아들의 앞날을 격려해주었다. 
아버지가 1만평에 달하는 과수농장을 내줬다. 농장을 다니며 빈 공간이 있는 곳마다 매실나무를 심었다. 놀아도 농장에서 놀았다.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블로그는 꼭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장에서 노는 모습, 풀 베는 모습, 꽃이 피고 과실이 익어가는 모습, 교육 받는 모습 등 농장의 거의 모든 것들을 블로그에 올렸다.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겠다고 각오한 이상, 일의 대부분은 풀과의 전쟁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예초기를 매고 풀을 깎았다. 이제 겨우 절반 정도 깎았나 싶어 처음 자리로 가보면, 말끔하게 깎았던 풀은 다시 처음처럼 우거져 있었다. 그래도 무슨 오기였는지 멈추지 않았다. 6개월에 한번 밖에 이발을 못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2013년과 2014년에 결과는 시원치 않았어요. 2013년에는 블랙컨슈머 때문에 고생했고, 2014년에는 매실 값이 폭락해서 힘들었어요. 그래도 가격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수확을 기다리다 못한 매실이 땅에 떨어져갔어요. 그 모습을 찍어, '저는 내일도 농부이고 싶습니다.'는 글을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올렸어요. 농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도저히 그 가격으로는 팔지 못하겠더라고요."
블로그를 통한 소비자들과의 꾸준한 만남, 농부로서의 자부심과 원칙은 20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15년 역시 매실 값이 좋지 않았지만, 예약을 시작한지 이틀 만에 출하 가능한 물량 주문을 끝냈다.

귀농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김병수 씨는 이제 웬만큼 자리를 잡았다. 매일 마주하다보니 5천주에 가까운 매실나무며, 감나무, 밤나무 하나하나의 특징도 잘 알고 있고, 3년 동안 풀을 깎은 땅은 이제 서서히 지력을 회복하고 있다. 소비자들에게 아동실농장도 알려져, 이제는 때가되면 '농부로서의 자부심'에 걸 맞는 가격에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그 뒤에는 말없이 뒤에서 밀어준 할머니와 아버지의 힘이 컸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제일 큰 힘이죠. 농사 선배이기도 하고요. 지역에 대해 잘 아시다보니 저한테 필요한 정보를 워낙 빨리 알고, 제게 전해주세요. 농법 같은 경우도 정말 웬만한 자료보다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듣는 내용들이 훨씬 정확한 경우가 많죠. 대신 저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나 판로구축에 신경 쓰고 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는 농사 선배이기도 하고, 함께 정보를 나누고 분업을 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한때 할머니와 아버지는 과수와 쌀, 잡곡을 함께 짓는 이른바 복합영농인이었다. 김병수 씨의 가세로 할머니는 전문인 잡곡을, 아버지는 욕심을 내고 있는 쌀을, 김 씨는 과수를 전담하여 농사짓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와 아버지는 얼른 큰 도시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저는 농촌 생활이 정말 좋아요. 매일매일 제가 보는 것들이 다르고, 또 거기에 맞춰 제가 하는 일들이 달라요. 그게 정말 재미있어요. 어려운 상황을 하나씩 헤쳐 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큰 곳으로 나가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오히려 제가 서 있는 이곳을 크게 키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제도 농부였고, 오늘도 농부다. 그리고 내일도 농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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