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도 세월의 풍화작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어서, 나를 옥죄던 그리움들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시절 내 상처를 보듬어주던 친구들과도 이젠 쓸쓸한 웃음 한 모금을 보태 회고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우리를 한숨짓게 했던 3인칭의 고유명사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나'와 '너'라는 주어만이 친구들 사이에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름도 있다. '청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면 '김승옥'이라는 고유명사 또한 우리에겐 영원불멸한 그 무엇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다소 내 기대에 어긋나는 책 제목의 김승옥 산문과 마주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그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레는 가슴 안고 서점에 뛰어가 보니, 나를 맞이하고 있는 건 일종의 신앙 간증이었다. 단 한 순간도 영적 체험이라는 걸 해본 적 없는 내가 그의 그 불가해한 경험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았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던 한 청춘이 어느 날 자애로운 하나님의 손길과 마주하게 되면서 '종교(정확하게는 개신교)'라는 망명지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표제 산문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정서적 박탈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청년 김승옥'에 대한 상실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대 한국문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감수성의 혁명'은 결국 그렇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버린 것일까? 쓸쓸한 심장 안으로 소주 기운을 쏟아 붇다가 책 후반부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글을 하나 발견했다. <'산문시대' 이야기>라는, 김승옥이 신도(信徒)가 아닌 아직 청년이던 시절(1970년대 중반)에 쓴 에세이가 그것이다.
<산문시대>는 1960년대의 벽두, 4.19라는 새로운 기운을 벼락처럼 맞이한 당대의 대학생들이 '새로운 한국 문학'을 꿈꾸며 만든 문학동인지인데, 특히 잡지의 창간을 주도했던 멤버들이 나중에 <문학과지성>의 출범과 그 이후 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만큼, <산문시대>는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말할 수 있다. 김승옥이 쓴 <'산문시대' 이야기>는 이 동인지의 탄생 과정에 대한 세세한 서술이다.
여기서 내 눈길을 붙든 것은 <산문시대>가 인쇄된 곳이 전주라고 서술한 대목이었다. 훗날 '첫 한글세대'로 기억될 이 서울 청년들의 패기와 열정을 어떠어떠한 경로를 통해 듣게 된 전주의 한 출판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것이 김승옥의 증언이다. '내가 당신들을 키우겠다'라는 말로 이 청년들에게 <산문시대>라는 인쇄물을 아무런 금전적 대가 없이 안긴 전주의 가림출판사는, 그렇게 김승옥의 기록으로 남아 한국현대문학사의 드라마틱한 한 순간을 완성해 주었다. 그 때 전주에 가림출판사가 그리고 그 출판사를 운영했던 김종배 사장이 없었다면 <산문시대>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산문시대> 없었다면 이후에 <문학과지성>이라는 한국현대문학의 거대한 산도 그리고 이 풍성한 밭에서 쏟아져 나올 수많은 걸작들도 갈길 잃어 오랜 시간 헤매었을지 모른다.
몇 주 전, 나는 전주시청과 구청 등에 이 전설적인 출판사(!)의 흔적을 문의해 보았다. 안타깝게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그 허탈하고 쓸쓸한 풍경.
지난 해 전북혁신도시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입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껍데기만 오고 알맹이는 아직 서울에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완판본의 고장 전주에 맛난 고명처럼 얹힐 수 있는 한국현대문학사의 결정적인 한순간, 그리고 가림출판사와 김종배 사장. 기왕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도 전라북도로 이주를 시작했겠다, 그 기록만 잘 챙겨두어도 전주는 출판의 메카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