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의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때로는 사회와 역사의 움직임을 좌우하기도 한다. 최근 두 정권은 적재적소에 맞는 인물을 찾지 못해 청문회 때마다 망신을 당하고 있다. 능력은 고사하고 번번이 법과 민주주의를 우습게 아는 인물들로만 어디서 그렇게 골라 뽑아 오는지 그 재주가 놀라울 정도다. 때문에 국민들은 투표를 잘못했다는 큰 빚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반대로 단 한 편의 글을 읽고 그 작가에게 모든 걸 걸어버렸던 이오덕 덕분에 우리 어린이 문학 세계는 큰 빛을 얻었다. 사람 보는 능력 차이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가 새로운 옷을 입고 태어났다. 이 책은 지난 2003년에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가 출판사의 장삿속에 동의할 수 없다는 당시 이오덕의 유족과 권정생의 뜻에 따라 절판됐다가, 권정생이 세월이 흐른 후 책으로 펴내라고 해서 그의 사후 8년 만에 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고흐와 테오를 생각했다. 비록 혈연관계이기는 하나 테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고흐의 명작들이 무슨 수로 세상에 나왔겠는가?
두 사람의 만남은 1973년 1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오덕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 저고리와 엄마'를 쓴 동화작가 권정생을 찾아갔다. 이오덕은 마흔 여덟이었고, 권정생은 서른여섯. 띠 동갑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만남은 30년이 이어졌고 고스란히 편지로 남았다. 적지 않은 나이차 때문에 이오덕의 말투가 좀 흐트러질 만도 했을 텐데 모든 편지를 눈을 씻고 다시 읽어봐도 공손과 공경뿐이다. 이오덕이 없었더라면 흙속의 진주로 사라질 뻔 했던 권정생도 이오덕에게 고마움을 표현할지언정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는 언제나 당당하다.
이오덕은 온 힘을 다해 권정생을 세상에 알렸고, 권정생은 죽을힘을 다해 글을 썼다.
편지는 적나라하다. 망설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자지가 오그라들었다' 고 푸념도 하고 실명을 거론하며 '그 인간 몹쓸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하다. 자신을 과장도 치장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보여준다. 이게 진정한 만남이 아닐까? 이랬기에 30년을 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설교했지만, 저는 한 덩어리의 오물(거름)이 되라고 하고 싶어요. - 권정생'
'동화란 것이 심심풀이 오락물로만 읽는 백만 명의 독자보단 단 백 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과 진실한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읽어주는 것이 더욱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처럼 훌륭한 작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절대로 함부로 책을 공짜로 주시 마십시오. 그냥 준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피땀 흘려 쓰고 만든 책인 것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 이오덕'
'올해도 보리밥 먹고, 고무신 신으면 느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가난한 것이 오히려 편합니다. 《아동시론》을 이틀 저녁 다 읽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두고두고 읽을 생각입니다. 먼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선생님을 가난한 우리 나라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완전히 어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도시의 아이들이 오히려 불쌍해집니다. 며칠 전에 시내에 들어가서 원고지 천 장을 사 왔습니다. 죽기 전에 써야 할 것을 어서 써야겠다고, 자꾸 초조해집니다. 선생님, 백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저는 역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아이들 곁에 있겠습니다. 이대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권정생'
권정생의 약값과 연탄 값을 걱정하며 원고료를 챙겨주려 백방을 뛰어다니는 이오덕은 정신적 동지이기도 했고 모든 것을 기댈 수 있는 매니저이기도 했고 보호자이기도 했다. 권정생은 평생 동안 결핵을 앓았다. 소변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집 밖을 나가는 것이 늘 모험이었다. 물욕이 명예욕이 전혀 없었던 권정생에게 최소한의 삶의 끈을 붙들어 준 이가 이오덕이었다. 권정생이 아픈 몸으로 끊임없이 하늘을 꿈꾸는 작가였다면, 이오덕은 현실에서 그 꿈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싸워주는 가장이었다.
서로를 걱정하고 이해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읽으며 위로를 받기도 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우리 문학사의 축복이다.
'소변에 섞여 나오는 농(膿)의 분량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인세가 나오면 또 약을 사서 먹겠습니다. 제 몸에 병이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면, 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새벽종을 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요즘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꼭 세상에 남겨 놓고 죽게 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건강해 지면 선생님 곁에 가서 살겠습니다. -권정생'
'거기 일직 교회는 햇볕이 앉을 곳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추울까요? 약을 계속해서 잡수셔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 그렇게 쇠약하신대도 책을 읽고 싶어 하시니,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반성됩니다. -이오덕'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이지만 문학적 향기는 권정생이 더 진하다. 하긴 고흐가 빛나야지 테오가 더 빛나면 안 되지! 편지 속에는 권정생의 삶의 깊이가 날 것으로 드러나 있다. 가슴을 콕콕 찌르는 문장이다.
'어두운 시대에 비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가 바로 한국의 글쟁이들일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살아남기 위해선 먼저 인간이 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이 없어지고 난 산천과 바다와 하늘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성서보다 자연이 더 많이 가르쳐 주고 마음의 평안을 줍니다', '가엾은 것은 내가 먹어버린 그 약자가 아니라 바로 강자로 군림했던 나 자신입니다. 눈 감으면 왈칵 울어버릴 것처럼 서러워집니다'
책에는 삽화가 네 컷 들어있다. 모두 노란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아직은 젊은 이오덕이 권정생을 처음 만나러 가는 장면(만남), 허름하기 짝이 없는 권정생 집 뜰팡에서 둘이 한 곳을 쳐다보며 얘기를 나누는 장면(교유), 나이가 든 권정생이 홀로 뜰팡에서 편지를 옆에 놓고 마른 나무를 쳐다보는 장면(이오덕의 떠남), 다시 둘이 만나 끝없는 길을 같이 걷고 있는 장면(하늘나라)이 그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책 내용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삽화만으로도 동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삽화처럼 두 거목이 하늘에서 다시 만났길 빈다. 이승에서 가졌던 육신의 고통은 모두 내려놓고 두 분 모두 건강한 몸으로 우리 아이들을 걱정하고 우리 어린이 문학을 걱정하고 통일 문제를 염려해 달라면 너무 뻔뻔한 짓일까! 후학들에게 죽비가 되어주신 두 분 선생님이 참으로 고마운 밤이다.
거들먹거리기나 좋아하고 게으른, 꼭 나 같은 짝퉁 글쟁이들뿐만 아니라 안개 낀 삶이 걱정되는 이들도 일독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