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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문화시평]
갑오년 함성으로 실어낸 혁명의 역사 고부봉기역사맞이 굿
김은정 전북일보 기자, 편집위원(2003-09-23 10:30:07)
역사는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과거의 역사는 내일의 참다운 역사를 세우는 가장 소중한 지렛대로서 의미를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는 곧 인간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중심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난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우리민족사에서 지나온 역사가 정당한 흐름으로 자리 잡아 온 적은 거의 없다. 정권이 지닌 힘의 정도에 따라 그것의 실체는 과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약화되기도 했으며 더러는 아예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기 일쑤였다. 백 년 전 우리 근대사의 문을 연 동학 농민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왜곡된 우리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백년이라는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동안에 그 역사는 과장되거나 약화되거나 아예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모든 과정을 거쳐야 했던 대표적인 우리 역사의 자산이 되었다. 갑오년 그해 착취와 수탈의 억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이 땅 농민들의 함성이 끝내는 좌절의 역사로 스러지고만 이후 그 혁명의 역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본래의 역사적 의의와는 관계없이 모습을 달리해왔던 까닭이다. 한 사회의 궁극적인 발전은 역사적 시각에 따라 규명되고 뒷받침된다는 한 역사학자의 주장을 빌리자면 우리사회의 진정한 발전은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암울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우리역사의 실체를 바로 찾아 세우는 일. 동학 농민혁명 백주년을 맡은 올해 꾸려지거나 앞세워지고 있는 갖가지 기념사업은 바로 이러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갑오년 전국 각 지역에서 봇물 터지듯 넘쳐났던 「반봉건 반외세」의 함성이 꼭 백년이 지난 1994년의 하늘을 다시 받쳐 들었다. 수탈과 착취의 억압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이 땅 농민들의 함성이 백년 후 함성으로 모아졌던 지난 2월 26일과 27일 동학 농민혁명의 들불을 지핀 정주시와 정읍군 일대는 온통 신명과 흥의 잔치마당으로 들썩였다. 「고부봉기 달맞이굿」이란 이름을 달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온 갑오년 역사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역사인식을 스스로 확인하고 다짐하는 의지의 결집이자 실천의 시작이었다. 이날 굿판에 짜여졌던 이틀 동안의 크고 작은 굿판들은 어쩌면 오늘의 우리 삶을 더듬어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동학 농민혁명 백주년을 맞아 그 기념사업을 꾸리고 있는 전국의 각 단체가 하나가 되어 역량을 모아낸 자리로서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이날 굿판은 한편으로는 오늘의 민족문화 운동 역량을 점검하는, 보다 구체적인 의의도 부여하는 자리였다. 이번 역사맞이굿은 오늘의 민족극과 민족굿의 성과를 아우른 총체적인 민족문화예술의 역량을 확인시켜준 굿판으로서 대중적 인식의 확산에 적잖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연행자로서 굿판제 직접 나선 참가자만도 5백여 명, 전국 가지역의 문화패들이 주도한 이번 굿판에서는 실제로는 무대를 꾸려가는 적극적인 참가자들이 있었긴 했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 보자면 그 자리는 구경꾼과 출연자가 따로 없는 참가자 모두의 체험과 참여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문화의 한마당이었다. 26일 하오4시 정주 시내를 가로 지르는 앞길놀이 「갑오세 가보세」로 시작된 이틀간의 「역사맞이굿」은 만석보 아래 배들평야에서 벌어진 횃불춤 한마당으로 막을 내렸다. 그 사이에 펼쳐진 역사재현굿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탐학의 대표적 상징인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는 고부땅 사람들의 봉기과정부터 만석보 혁파 장면까지의 사건들이 백 년 전의 장소와 상황대로 재현됐다. 「났네 났네 난리가 났어」「칼노래 칼춤」「드는 낫으로 네목을 치리라」「천석꾼아 만석꾼아 보릿고개 주먹밥 썩 내놓아라」「오늘은 백만농군이 모다 봉준이이로다」등 10여개의 마당극이 재현해낸 갑오년의 사건은 구경꾼으로 모여든 수많은 관중들을 역사적 중심에 끌어들였다. 이 굿판을 짜낸 기획진의 의도대로라면 이것만으로도 굿판재현의 의미는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 행사의 보다 큰 의미는 전국 각 지역의 문화패들이 한 뜻으로 모여 우리 역사의 복원을 위해 그 역량을 집결해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이날 굿판은 자체적으로는 민족예술의 역량을 집약해내는 자리로서의 의미를 크게는 민족굿과 민족극 양식을 오늘에 되살려내는, 그래서 오늘의 연회양식으로 재창조해내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번 굿판은 적잖은 어려움을 안고 준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굳이 실무적인 어려움이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단체들이 모여 한 무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어려움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 객관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전국 각 지역의 문화단체들의 차별성과 역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이 지닌 역사적 대의만으로 모인 5백여 명의 문화패들이 펼쳐낸 이 굿판은 그 어느 부분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적 재창조이자 체험이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만났던 기존의 공연 양식에 비춰 본다면 이번 굿판은 분명히 잘 다듬어지거나 세련된 공연 무대로 보여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무대와 객석이 분리 되어 있는 형태와 볼만한 거리에만 길들여져 있는 소극적 체험이 그동안 우리 관객들의 몫이었다면 아무래도 이번 굿판은 분명히 그 문화의 중심권으로부터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양식의 틀로 꾸려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정된 예산, 각각의 독자적 틀을 갖추고 있는 문화패들의 결합 5백여 명에 이르는 출연진을 하나로 모아내야 하는 물리적인 여건, 굿판 재현 현장의 지역성 정서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감수해가며 올려진 이 행사는 공동사업의 전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공동체 문화의 새로운 틀 거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따로 있다. 진원지인 이땅의 사람들로서 이 역사적인 문화판에 가장 굵은 역할을 해야 했을 전북지역의 문화운동 역량이 정작 이 굿판에서는 제대로 살려지지 못했던 점이 그것이다. (이 지역 문화운동의 체면치례를 해주었다.)참여의 몫이 얼만큼의 무게로 실려졌던 간에 이 굿판에 참여했던 전국 각 지역의 문화단체들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오늘에 생생한 기운으로 받아 내보고자 하는 이 행사의 대의에 뜻을 모았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행사에서 드러났던 이 지역 문화단체들의 소극적 참여는 더욱 큰 아쉬움을 줄 밖에 없었다.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은 갑오년 함성으로 실어낸 우리역사를 보다 새롭게 확인하는 바로 우리 모두의 잔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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